▲ 송명재 한수원 방폐물 사업본부장
‘야누스(Janus)’란 두 얼굴의 머리를 가진 로마신화 속의 수호신이며 그리스신화에는 이에 대응하는 신이 없다.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고 하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야누스가 두 얼굴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인용은 사실 공정하지 못하다. 로마의 신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되고 또 가장 위엄을 갖춘 신이기도 한 야누스는 속임수를 쓰기 위해서 두 얼굴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집을 보호하기 위해서, 특히 건물의 출입문을 지키기 위해서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얼굴은 들어오는 사람을 검문하고, 다른 얼굴은 집을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야누스는 집안의 안전과 도로의 보호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원자력을 흔히 야누스의 두 얼굴에 비유하기도 한다. 원자력은 잘못 이용하면 대량 살상 무기로 사용할 수 있으나 제대로 활용하면 평화적인 목적으로 얼마든지 이용 가능하다. 원자력은 에너지 자원이 모자라는 나라에서는 준 국산에너지로서 애국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요즘처럼 세계가 에너지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는 더욱 더 그 가치가 돋보인다. 게다가 원자력의 일종인 방사선을 이용한다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또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여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야누스의 한 쪽 얼굴이 집안의 안전을 도모하고 손님들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과 같다.

원자력의 다른 얼굴은 인명을 대량 살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원자폭탄은 무차별 희생을 초래했다. 또 여느 폭탄과는 달리 그 후유증도 오래 지속되어 원자력은 방사능 오염이라는 공포증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듯 원자력은 폭탄으로서의 얼굴이 너무 강해서 평화스러운 모습은 그 존재가 미미해져버렸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원자력을 평화를 가장한 악마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라고 몰아붙이기도 한다.

로마신화 속의 강력한 신인 야누스가 두 얼굴로 인해서 위선자로 오해를 받고 있듯이 원자력이 위선적인 야누스라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된 주장이다. 원자력의 평화적인 이용과 원자폭탄은 그 성질이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완전히 다르다. 원자력 발전이나 방사선의 이용에 대한 가치를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원자폭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강력한 무기이다. 원자력의 평화적인 이용은 원자폭탄이라는 얼굴을 위장하기 위해서 고안된 궁여지책의 수단은 아니다.

사실 세계 제 2차 대전 때 미국은 당시 적국이었던 독일이나 일본이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하면 연합국 측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거나, 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면 양 측이 더욱 더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원자폭탄 개발에 서둘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원자폭탄은 대량의 인명 살상을 목적으로 해서 개발되지는 않았고 더 이상의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개발되었다. 원자폭탄 개발의 진정한 의미는 계속되는 전쟁을 종식 시키고 또 다른 전쟁의 억제에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야누스의 다른 얼굴이 출입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사람을 검문함으로써 나쁜 사람이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집안사람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최근 북한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하였다고 하여 국제 사회가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이 완전한 것이었든 아니든 이는 그 자체로 국제 질서를 파괴하고 국제 평화를 깨트릴 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북한의 핵보유가 전쟁을 억제하고 소중한 인명의 희생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하여 원자력발전에도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제발 우리 경제의 원동력이 되고 있고, 원자폭탄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원전에 대해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원전은 집안의 경제를 돕기 위한 시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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