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생산에서 석유의 중요성은 오래 전부터 높았지만, 일상생활로의 진입은 좀 더 저렴하고 편리한 등유(燈油)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에 의해 이루어졌다.

석유 부산물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한 중동지역에서 문명의 발달 이래로 도로건설을 위한 아스팔트, 선박 또는 건설에 필요한 방수재료로서 뿐만 아니라 의약 및 치료의 목적으로 원시적이지만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역청(Bitumen)은 군사용 또는 기타 분야에서 널리 이용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고대 사회에서 널리 사용된 이래로 수세기에 이르는 석유의 이용은 한정적이었으며, 주로 지표면을 통해 흘러나오는 석유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역에 제한되었다.

긴 암흑기를 지나고, 유럽과 미국의 아마추어 및 프로 화학자들이 석유로부터 등유를 추출해내는 실험들이 수행되었던 1850 중반, 석유는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석유 정제의 개발자로 주장되는 많은 사람들 중에, 1854 ‘등불 또는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석유생산물 ‘케로진(Kerosene)’을 미국에서 특허 등록한 캐나다인 아브라함 게스너(Abraham Gesner)가 특별한 주목을 받을만하다. 다른 등유들보다 싸고, 안전하고 그리고 편리했기 때문에 석유의 사용은 서부 펜실베니아와 뉴욕에서 널리 이루어졌다. 당시까지 부유층으로부터 선호되었던 고래 기름이 대서양에서의 남획으로 인해 고갈되고 있었던 상황도 그 부분적인 원인이었다. 추가 고래 기름의 확보를 위해서 남아프리카 해안에 이르는 원거리 항해가 필요했고, 이는 결국 고래 기름 가격의 상승을 가져왔다. 하지만 석유가 시장성을 가지는데 가장 중요한 장벽은 어떻게 충분한 양을 생산할 것인가에 있었다. 고대 이후로 석유 추출의 기술은 원시적이고 아마추어적인 도구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 여전히 수작업에 의한 것이었다. 프랑스, 일본과 몇몇 아시아 국가들 특히 아제르바이젠에서 시추방식에 대한 예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위대한 혁명은 1859년 미국 펜실베니아인인 에드윈 드라케(Edwin Drake)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천공기(drilling machine)를 이용하여 지하 암반 아래에 있는 석유의 시추에 성공했다.

지리학이나 공학에 아무런 지식이 없었던 자칭 ‘대령(Colonel)’은 인생의 실패자 같았다. 영웅적인 성공을 꿈꾸었던 그는 많은 사업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고, 결국 증기선 선원, 농장 노동자 등 많은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관절염 치료를 위해 커네티컷의 뉴 헤븐에서 휴가를 가지는 동안 그는 죠지비셀(George Bissell)이라는 지방 은행사업가를 만났다. 비셀은 펜실베니아 티슈빌의 작은 마을 주변에 있는 진흙 언덕에서 경제성 있는 규모의 석유를 개발하기 위한 작은 사업체를 몇 명의동업자들과 형성하고 있었다. 희망 없는 사업에도 도전하는 돈키호테식 성격과 회복기의 건강상태는 드라케 스스로가 비셀이 꿈꾸고 있는 별난 모험을 수행할 적절한 사람이 되게 했다. 새로운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비셀과 다른 동업자들은 비록 그가 철도승무원 제복을 입어 본 것이 고작이지만, 대령이라는 호칭으로 위엄을 갖추게 했다.

실패 이외에는 다른 이력이 없었던 사람에게는 기대하기 힘들었던 성공이 1859. 8. 28. 이루어졌다. 그가 비셀의 제안에 의해 새로이 고안된 방법으로 석유를 시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작은 규모의 지역 근로자들과 함께, 그는 증기 기관에 의해 회전하는 커다란 축을 덮는 나무로 된 타워를 세었고, 회전축에는 그 끝에 철제 착암기(bit)가 연결된 케이블이 감겨있었다. 회전축이 돌면서 도르래에 의해 케이블과 착암기를 들어 올리고 다시 지면 위로 그것을 떨어뜨리면서 구멍을 파는 것이었다. 암염 돔을 파기 위해 사용되었던 기술이 1847. 아제르바이젠에서 처음으로 석유를 시추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드라케가 여기에 결정적으로 스스로 개발한 방안을 추가했다. 그는 파이프를 아래로 내려 보내서 기술자들로 하여금 그 파이프 내부를 뚫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서 구멍의 측면에서 나오는 물과 부서진 토석들이 착암기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현대 석유 산업에서 굴착 모델을 만들었으며, 결국 1901. 텍사스에서 로터리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된다.

드라케는 석유 산업에서 하나의 또 다른 금자탑을 세우는데, 그것은 원유의 수집과 수송을 52겔론(약 159리터)의 목제 통(배럴, barrel)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주로 위스키 업계에서 사용하던 배럴은 오늘날의 석유산업에서도 생산과 소비의 기본적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초기생산량은 하루에 35 배럴이었고 배럴 당 40달러에 팔렸으며 이는 현재 기준으로 600에서 700 달러 정도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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