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케의 획기적 성공은 석유산업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의 성공에 대한 온갖 루머와 글들이 고래 기름에 대한 대체물로서의 석유에 대한 꿈같은 환상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은 ‘검은 금(金)’인 석유가 일확천금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였다.

어느날 갑자기 서부 펜실베니아는 통역사, 정제업자, 거래중개인, 딜러, 은행원 등을 비롯한 수천명의 일명 광산투기꾼(Wildcatter)이라 불리는 아마추어 석유 개발자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1861년 첫 석유 정제시설이 가동되었고 처음으로 석유를 선적한 배가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영국을 향했다. 1865년에는 처음으로 석유 소송 파이프라인이 완공되었으며, 이로 인해 하루 약 800배럴의 석유를 40마일 정도의 거리를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검은 황금 러시(Black Gold Rush)’라 불리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 시장과 곧 이어서 유럽 시장으로 수출된 케로진의 생산 증가가 이루어졌고 이는 석유의 생산 증가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렇게 떠오르는 새로운 산업은 비합리적인 선구자들로 인해 잠재적인 악몽이 되고 말았다.

새로운 석유전의 발견이 변덕스럽고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뿐만 아니라 개발된 유전에 대한 초보 개발자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석유의 매장상태에 대한 기술적 무지와 더불어 자신의 토지 아래에서 개발된 모든 자원에 대한 소유권은 토지 소유자에게 귀속된다는 법적 틀이 새로운 석유전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엄청난 석유가 시장에 공급되었고 가격은 폭락했으며 이 새로운 희망에 부채를 포함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투자했던 많은 사업가들이 파산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심한 가격 변동이 석유산업의 일반적 특성이 되고 만 것이다. 1860년 석유가격은 10센트였고, 1861년 다시 10달러가 됐다. 1862년 가격은 다시 10센트에서 2.25달러 사이를 오가면서 평균 1.5달러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산지에서 석유의 배럴 당 가격은 1863년 3.5달러, 1864년 8달러, 1866년 4달러, 1867년 2.8달러, 1869년 5.8달러, 1871년 4.2달러, 그리고 1873년에는 2달러라는 평균 가격을 보였다. 물론 이 산술적 가격들이 한 해 사이에 발생한 급격한 가격 변동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약 2.5달러에서 3.5달러 사이의 가격대를 형성하던 목재 통(배럴) 자체의 가격이 그 내용물인 석유 가격보다 비쌌다.

하지만 드라케는 새로운 산업의 날카로운 파동을 이겨내지도 못했고, 그의 전 인생을 따라다니던 실패의 그림자를 지울 수도 없었다. 1861년 그가 시추한 유정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그가 운영하던 회사의 모든 기계와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모아 두었던 재산으로 석유 거래와 같은 새로운 산업에 투신했지만 결국 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펜실바니아 주 정부로부터의 약간의 연금과 그를 동정했던 몇몇 친구들의 도움으로 인해 극악한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결국 가난과 함께 그의 삶을 마쳤다.

이 시기에 즈음해서 석유산업에서 뿐 아니라 모든 현대적인 산업 분야에서 가장 온화하고 동시에 무자비한 사업가들 중의 하나인 새로운 역사적 인물인 록펠러(1839년부터 1937년까지 생존)가 등장한다.

- Wildcatter라는 말은 초창기 석유 시추가 아주 고립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곳에서 시추 기술자들이 야생고양이의 울음을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기원한다. 오늘날 ‘Wildcat’은 확인되지 않은 석유층을 찾기 위한 탐사유정(Exploration Well 또는 Exploratory Well)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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