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족의 달이다. 5일은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어린이 날이고 8일은 어버이날이며 15일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신 스승의 날이다. 그리고 19일은 앞으로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새로운 세대를 격려하는 성년의 날이기도 하다.

가족(家族)이란 말은 원래 한자어로 중국에서 넘어온 말이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가족이라는 말 보다는 가인(家人)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가족(家族)의 가(家)는 갓머리(집) 안의 돼지 시(豕)를 의미하고 족(族)은 무리 족(族), 씨(族)를 의미하는 것으로 집안에서 돼지를 키우는 혈연 관계자들을 나타낸 말이라고 한다.

반면 영어의 가족을 의미하는 Family는 원래 하인이나 노예를 뜻하는 라틴어 famulus 에서 유래하였고 이 후 한 집안(가족과 하인을 포함하는 개념)을 의미하는 라틴어 familia 를 거쳐 중세영어 familie가 되었고 현재의 가족(동거 여부를 불문하고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을 뜻하는 family로 변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가족보다는 식구(食口)라는 말을 즐겨 쓰고 있다. 식구(食口)의 의미는 한자어 그대로 먹는(食) 입(口), 즉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가족의 의미를 중국이나 일본 또는 영어의 일하는 사람(돼지를 키우고 노동을 하는 하인이나 노예)보다는 함께 정을 나누며 생활하기 위해 밥을 먹는 의미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보여 진다.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렸다. 마침 옆자리에 젊은 부부가 연로한 아버님을 모시고 와서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젊은 며느리가 팔순 가까이 되셨을 시아버님께 살뜰하게 고기 점을 챙겨주며 다정하고 공손하게 시중을 드는 모습이 정겹고 대견해 보였다.

식사 시간 내내 옆 자리 젊은 부부와 시아버지를 보며 필자는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님과 함께 식사도 못하고 전화 한통으로 때운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식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 젊은 부부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표하며 5월 가족의 달이 가기 전에 사랑하는 어머님과 자녀들 모두 모여 온 식구가 함께 식사라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며칠 전 멀리 떨어진 지인으로부터 반가운 메일을 받았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가슴 뭉클한 글이 있었다. 어렵고 힘든 세상을 묵묵히 헤쳐 나가며 온 식구의 바람막이와 등불이 되어 주는 세상의 아버지들을 존경하며 어느 대학교 총장께서 쓴 글을 소개한다.

‘아버지’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 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서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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