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가정집 화재현장에서 여섯명이나 되는 소방관들이 순직한 것이 불과 수삼일전인데 7일 오후, 부산 연수동에 있는 10층짜리 빌딩 화재현장에서 또 한사람의 소방관이 진화작업중 순직했다는 소식이고 보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더구나 이 두곳에 화재가 모두 홧김에 저지른 방화때문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며 홧김에 서방질은 어디가고 이제는 걸핏하면 홧김에 LP가스통을 들고 나서거나 불을 질러대는 사고가 늘고 있으니 걱정중에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여섯명의 순직 소방관들은 1층에서 발화한 불이 2층으로 옮겨 붙자 일단 급한 불길을 잡아놓고 구조해야할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건물안으로 들어갔다가 건물이 붕괴되는 바람에 변을 당한 것이니 생존자 한사람이라도 구하겠다고 나선 이들의 행동이야말로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과 공직들의 복지부동과 무사안일이 말씀이 아니라는 세태에 보기드문 직업의식이고 사명감이었으며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 그야말로 사생취의(捨生取義), 살신성인(殺身成人)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지사(志士) 인인(仁人)은 삶을 구하며 인을 해치는 일은 없고 살신(殺身)함으로써 인(仁)을 이룩한다(志士仁人 無救生而害仁 有殺身而成人)’

이는 논어 위령편(慰靈扁)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 ‘뜻이 있는 사람이나 어진 사람은 목숨을 아까워하여 인에 어긋나는 일은 없고 제 한몸을 죽이더라도 인을 이룩하고야 마는 법’이라는 뜻으로 공자의 이 유명한 말은 그의 가르침 전부를 오로지 인(仁)이라는 말 한마디로 다 표현했다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음이라도 다짐한다는 결의를 표시한 것이겠거니 해석하지만 공자도 논어 전편에 1백번도 더 나오는 인(仁)의 뜻을 한마디로 똑소리나게 일러주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어떤 제자가 물으면 ‘남을 사랑하는 것(愛人)’이 인이라 했는가하면 또 다른 제자의 물음에는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을 인이라 했고 누구에게는 또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고도 해 묻는 사람에 따라 달리 말해주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자기 한목숨 살겠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구차스럽게 연명하기 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라도 남을 살리려는 사람이 곧 지사요 의인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말인 ‘살신성인’에 비추어, 순직한 여섯 소방관 모두 추호도 이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으며 한사람 한사람 의롭고 숭고한 죽음 아닌 사람이 없다.

그중에서도 119 구조대원으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최후까지 애쓰다 생을 마감한 서른한살 박준우소방사의 시신마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남을위해 쓰여질 수 있도록 병원에 기증한 그의 가족들과 한달전 쯤 E-메일을 통해 후배에게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내 한목숨 선선하게 내던질 수 있다는 것, 나는 이것도 성직(聖職)으로 여긴다’는 내용과 함께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이 직업에 만족한다’고 한 고(故)김기석 소방관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꿋꿋하고 의연한 신념에 이르러서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며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의로운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고, 다시는 이와같은 비통한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잠시 슬픈 마음을 가다듬고 몇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인명구조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불길이 남아있고 붕괴위험마저 있는 건물에 소방관들의 진입이 과연 적절했었던가 하는 점과 30여년전, 철근 한 오라기 들어가지 않고 벽돌로만 지어졌다는 건물의 붕괴위험을 사전에 알고 예방조치 할 수는 없었던 것인지, 그리고 이번 참화에 가장 큰 원인중에 하나이기도 했던 소방도로의 확보와 이면도로에 주차문제는 앞으로 어떻게할 것이며, 지금 이시간에도 박봉 등 열악하기 짝이 없는 근무환경속에서도 사명을 다하고 있을 소방관들을 위해 당국이 서둘러 해결해야할 문제들은 없는 것인지 등등이 우리가 염려하는 바로 그런 것들이다.

도스토에프스키는 그의 작품 악령(惡靈)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고 했다.

사명감이 남달랐던 소방관들이 저승에서나마 행복을 누리기를 빌고 아울러 그들 영전에 삼가 조의와 함께 명복을 빌며 아쉽고 애달픈 마음을 달랠 뿐이다.

< 한기전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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