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가 며칠 계속되더니 산과 들, 골목마다 거리마다에 개나리, 진달래, 벚꽃과 목련 등 봄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져 사람들의 마음을 싱숭 생숭 설레게 하고 있다.

그러나 봄은 이렇게 어김없이 찾아와 우리들 주변을 싱싱하고 새롭게 꾸며주고 있지만 지구촌 한모퉁이에선 밤이나 낮이나 포성이 진동하고, 온통 어수선한 일들이 엎치고 덮쳐 그야말로 봄은 왔으되 봄같지 않은 봄이며 4월이다.

막바지에 이른듯한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 그렇고, IMF 외환위기 못지 않은 경제위기라며 제2의 외환위기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좋지 않은 경제 사정이 또 그렇고, 괴질인지 사스(SARS)인지 중국에서 시작돼 전세계로 퍼지며 겁을 주고 있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치료약도 없다는 이 병도 봄을 봄 같이 느낄 수 없게하는 것들 중의 하나다.

취직자리가 없어 방황하는 젊은이들, 북한의 핵문제, 크건 작건 장사가 안돼 죽을 맛이라는 기업들의 사정 등도 모두 다 선뜻 벚꽃 향기에 취할 수 없게 하기는 매한 가지다.

속단은 아직 이르고 성급하다 하겠지만 시작이 반이란 말도 있는 터, 한껏 기대를 모으며 들어선 새정부도 정작 서민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경제살리기나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귀가 번쩍 할 만큼 속시원한 얘기는 아직 없고 언론이 어떻구, 파격인사가 어떻구하는 등 엉뚱한 일들에나 더 열을 올리고 있는듯 싶어 답답하고, 언제쯤이나 시원한 소리를 듣게 될런지 안달, 조급증이 생길 지경이다.

그러나 기다려 보자. 희망을 버리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려 보자. 이 봄도 그냥 공으로 찾아 든 것이 아니라 지난 겨울 그 길고도 매섭던 추위가 있어 비롯된 것이며 기다리는 인내와 정성이 있어 오늘 이 훈풍이 한층 따사로운 것 아니던가.

‘사월은 잔인한 달’ 이라고 장문의 시 황무지(荒蕪地) 첫머리에 읊어 이름 높은 T.S 엘리엇도 ‘죽은 땅에서도 라이락이 피어나고/ 추억과 욕망은 뒤섞이며/ 잠든 뿌리도 봄비에 깨어나네’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엊그제 내린 봄비에 고대하는 새싹이 반드시 움틀 것이란 확신을 버리지 말고 기다리며 이 봄을 봄답게 느끼고 맛보자.

일년 중에 가장 즐거운 왕이라는 봄(내쉬), 일년 중 단 한번 밖에 없다고 노래한 봄(쉘리), 꽃피고 향기 피어 오르는 사랑의 계절 이라는 봄(하이네)을 가슴 한껏 부풀도록 그득히 퍼 담자.

그의 수필 ‘봄’에 ‘민들레와 오랑캐 꽃이 피고 진달래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사향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사십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적은 축복이 아니다’ 라고 쓴 피천득(皮千得) 교수는 ‘더구나 봄이 사십을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나 녹슬은 심장도 피가 용솟음 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 해마다 이렇게 봄을 누릴 수 있다는 것, 그 기회와 은총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그런 봄을 그냥 별볼일 없이 스쳐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잠시 어수선하고 우울한 일들일랑 떨쳐버리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들길로 나서자. 오래도록 변함없는 아름다운 봄빛(百年春色)에 한나절, 아니 반나절만이라도 몸과 마음을 내 맡겨 보자.

그리고 도롱이에 삿갓쓰고 호미들고 나가 봄을 줍자(輕蓑短笠伴春鋤), 어수선한 봄이지만 나아가 봄을 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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