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영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석유가스정책연구본부장
[투데이에너지] 진공상태(state of vacuum)는 공기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우주공간이 이와 유사한 상태라고 한다.

매질(媒質, medium: 파동을 전달시키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기에 소리도 전달되지 않고 공기의 저항이 없어 볼링공과 깃털의 낙하속도도 동일하다고 한다.

실험실에서도 완전한 진공상태는 만들기 어렵다는데 이런 상태와 에너지시장이 유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최근에 흥행한 영화인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마션’에서 본 무중력상태가 연상돼서 그럴지도 모른다. 물체들이 중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면 방향성을 갖지 못하고 둥둥 떠 있고 시간도 제멋대로인 그런 공간 말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우리는 상승하기만 하는 에너지수요와 국제유가를 목격했고 그 관성에 익숙해 있었다. 에너지시장에서 가격상승과 수요증가가 동시에 발생해도 ‘그게 정상인거야’하며 넘어가는 상태가 10년 이상 지속됐다.

그러던 상태가 미국발 금융위기, 중국의 성장세 둔화, 유럽의 경제위기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수요증가세는 눈에 띄게 둔화되고 에너지가격도 셰일오일 개발과 함께 폭락세를 보이게 됐다. 마치 중력이 거꾸로 작용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수년 동안 지속되더니 올해 초부터 어느 정도 안정세를 찾는 것처럼 보인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리면 한동안 지면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나는 것처럼 지금 우리의 에너지시장이 잠시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진공상태에 접어든 느낌이다. 가격이나 수요의 움직임이 방향성을 상실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국제 원유시장에서는 OPEC과 러시아가 갑자기 감산합의를 도출하고 진공의 공간을 틈타 잃었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

에너지시장이 이렇다보니 에너지산업 및 정책도 갈팡질팡 하지 않을 수 없나 보다. 석유 메이저를 위시해서 국영석유회사, 각국의 대형 유틸리티, 원자력산업 등 세계 에너지산업의 큰손들도 몸집과 투자를 줄이면서 관망세를 보이고 있다.

재생에너지산업의 위세도 고유가시기와는 사뭇 다른 자세를 보이고 있다. ‘화석에너지 고갈론’이나 ‘그리드패리티’, ‘장밋빛 시장전망’ 등이 이전과 달리 퇴색한 느낌이다. 진공상태에서는 매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충격의 전달 역시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국제협약이건 지정학적 돌발 상황이건 그 충격파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줄어든 느낌이다. 파리협약이 체결되고 이산화탄소의 감축이 절실하다는 보고가 나와도 에너지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느껴지질 않는다.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감축 및 신재생에너지 확대정책도 실제 시장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예외는 있었다. 전기요금 누진제와 지진발생에 따른 원전안전 문제이다. 두가지 예는 우리 에너지부문에 강한 충격을 줬다. 주유소 펌프의 기름가격이 천정부지로 높아질 때에 보인 관심에 필적할 관심이 전기요금 고지서 요금폭탄 논란으로 이어졌다.

경주지진은 향후 신규원전 건설뿐만 아니라 기존원전의 운영에도 영향을 줄지 모를 정도로 인화성이 높은 사태로 간주되고 있다. 국제 에너지시장은 진공상태로 갈팡질팡하고 있고 국내 에너지이슈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거진다.

그럼에도 장기 에너지정책의 방향성은 분명하다. 저탄소 경제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정책이 일관성 있게 추진돼야 한다.

그러나 디테일에 있어 어떤 경로로 어느 정도의 속도로 추진돼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내년이 ‘에너지기본계획’을 다시 준비해야 하는 년도다. 매번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때와 같이 해 ‘에너지기본계획’이 발표됐다. 5년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국제 에너지시장 상황을 이번 계획이 어떻게 반영해서 정책으로 담아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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