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에너지]  학부에서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열에너지분야를 전공하면서 35년간 연구와 학술활동을 수행해왔다. 그렇지만 세상이 많이 바뀌어도 교수의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강의라 생각한다.

강의는 교과서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심의·평가나 산학연 교류를 통해 접한 최신의 정보는 수업 중간중간에 적절히 포함시킴으로써 생동감을 주려하고 있다.

그 외에도 관련되는 서적을 읽히는 것인데 미래의 자신의 직업이나 진로와 직결되는데도 불구하고 강제하지 않으면 좀처럼 읽지 않으려는 경향이다.

현재 담당하는 열역학이나 냉동·공기조화를 가르치면서 주교재 외에 최신의 트렌드를 담은 에너지 관련 서적을 지정하고 실제로 기말시험에 출제를 하고는 한다. 최근의 목록에는 UC버클리에 재직 중인 리처드 뮬러 교수의 ‘대통령을 위한 에너지강의’가 있다. 저자가 책 제목을 이와 같이 붙인 이유는 정치·경제·외교·국방 등과 달리 에너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너지를 잘 아는 에너지담당 장관이나 보좌관에게 일임하면 좋겠지만 에너지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예를 들어 장관은 원자력발전은 매우 위험하다고 하는 반면 보좌관은 방사능 유출로 사망한 사람이 없고 가장 경제적인 발전 방식이라고 주장할 경우 대통령은 두 의견을 비교해서 판단해야 하는데 전문성을 요하는 상반되는 의견을 조정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 위험한 것은 장관, 보좌관 모두 한쪽에 편중된 의견을 가지고  코드가 맞지 않아 상반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근처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경우이다.

장기간에 걸쳐 추진되는 에너지정책은 한 번 만들어지면 수정이 매우 어렵다. 대형발전소는 몇 년이면 후딱 만들 수 있는 단순한 플랜트가 아니다. 이 책의 몇 가지 내용을 추려보면(원전 옹호론자들이 들으면 매우 기뻐하겠지만) ‘원자력에너지는 생각보다 안전하고 핵폐기물 저장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수소에너지시장은 미래가 없다’ 등이다.

에너지부국인 미국에서 나온 책이기 때문에 우리 현실과는 다소 맞지 않거나 소홀히 다룬 내용(에너지절약 및 고효율에너지시스템 등)도 있으나 저명한 학자가 올바른 정책을 위한 진심어린 조언, 이것이 강대국 미국의 또다른 저력 아닌가싶다.

또 하나의 주목해야 할 책이 토니 세바의 ‘에너지혁명’이다. 주요 내용은 모든 새로운 에너지는 태양과 바람에 의해 제공된다.

가까운 미래에 휘발유는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원자력은 구식이 된다 등. 태양, 풍력의 중요성은 두 책 모두 공통적이나 원전과 관련해서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책으로서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내용이다.

‘에너지혁명’에서 태양전지의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해서 한계비용이 제로가 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인데 이대로 실현되면 얼마나 좋은가. 필자가 일독했을 때 에너지 유토피아가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에너지절감이라든가 고효율에너지시스템, 열에너지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이제 전기에너지는 사실상 공짜인데 아낄 이유가 없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해프닝으로 끝난 저온핵융합의 성공이 보도됐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와 같이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의견이 제시되면 그 판단이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봐도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면 편중된 견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태양광 연구자들과 원자력 옹호론자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나름 충분히 설득력 있는 논리를 펼친다. 문제는 현재 에너지정책과 관련된 의사결정 라인에 환경론자, 태양광, 수소에너지 지지자들만 포진한 느낌이다. 원전은 그렇다고 치지만 여전히 열에너지 전문가가 의견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듯하다.

2018년도에 대한설비공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학회를 중심으로 올바른 에너지정책, 특히 열에너지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중립적인 시각에서 정책입안자들에게 열에너지 설비 및 제품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정부, 국회 그리고 언론에 접촉했다.

하지만 원전 관계자들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홍보와 로비와 비교하면 훨씬 더 많은 설비분야 전문가들이 동참해야만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 열에너지분야가 정책적으로 주목 받은 기억은 거의 없다. 최우선의 에너지정책은 늘 전기에너지에 집중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 중후반 KIST에서 연구활동을 할 때부터 에너지 관련 연구비는 전력기금과 에특자금으로 이원화돼 열에너지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수준의 연구비 지원을 받는 형편이었고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같은 에너지분야라도 원자력공학과의 신진교수가 기계공학과의 중진교수보다 훨씬 많은 연구비를 수주하는 것은 상식이다. 이 분야에서 연구한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지만 아쉬운 점이다.

우리나라 최종에너지 소비의 13%가 전기인 반면 냉난방과 온수급탕 등에 소비되는 열에너지는 28%이다. 전기에너지의 중요성을 평가절하 할 의도는 없으나 대부분의 에너지를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의 에너지구조상 어느 정도 균형은 맞출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열에너지의 정책은 어디에 맞춰야 할까? 여름철 공공건물 실내온도 높이기,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등끄기 운동 수준의 에너지절약은 효과도 미미하고 직무능률을 떨어뜨리는 미련한 행위이다.

산업용 열에너지는 별개로 하고 건물부문에서 소비하는 에너지가 20%를 상회한다. 정책적으로 여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나마 건물에너지 저감에 주목하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패시브하우스에 이어 제로에너지건물(ZEB)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된다.

이 과정에서 건물의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와 에너지를 주관하는 산업통상자원부의 조율이 관건이다. 패시브하우스는 단열재, 창호, 열교 등 건축과 직결되지만 제로에너지건물이 되면 고효율설비와 신재생에너지가 매우 중요해진다.

현대 건물에서의 에너지소비는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가전, 조명보다도 냉난방 및 환기와 같은 공기조화설비에서 소비하는 에너지가 70% 이상이다.

고효율에너지기기 및 시스템을 사용해도 한계가 있고 0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에너지를 생산해야 하는데 건물에서 이용 가능한 재생에너지는 사실상 태양광과 태양열 밖에 없다. 지열이나 수열원 히트펌프는 일부의 열을 자연으로부터 뽑아오는 일종의 고효율에너지기기이지 에너지를 생산하는 개념은 아니다. 이를 구동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적지 않은 전기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현재로서는 지붕이 있는 단독건물이나 아파트 최상층이 제로에너지건물의 최적대상이다. 아파트를 ZEB화하려면 각 세대에서 에너지를 생산해야 하는데 발코니나 전면벽에 태양전지를 설치해봐야 미미한 수준이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집단에너지 차원에서의 접근과 아파트 최상층에 적용하는 Net ZEB이며 나머지 층은 패시브하우스에 고효율에너지의 접목으로 nearly ZEB를 도모하는 것이다.

ZEB에 공기청정과 환기 및 쾌적한 온습도 조건, 이것이 열에너지 전문가들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여기에 적용할 수 있는 신기술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척박한 우리나라 연구개발 풍토에서 탄생한 세계 최초의 제습·환기기술이다.

기술적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면 대학에서 냉동•공기조화 배울 때만 해도 온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습도만 떨어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배웠다. KIST에 근무할 때 부서장이 이런 기술의 개발을 아쉬워하곤 했으나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나 세계 최초로 후배 박사에 의해 실현된 것이다. 에어컨을 작동하면 온도와 습도 모두 낮아진다. 한여름에는 아주 바람직한 일이지만 잠열부하가 큰 장마철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내온도가 28℃, 습도가 85%이면 약간만 움직여도 불쾌감을 느끼는 환경이다(참고로 에너지이용합리화법에 의해 관공서에서 이 조건에서는 에어컨을 작동하지 못한다). 제습로터와 소형 히트펌프로 구성된 이 기술을 적용하면 훨씬 적은 에너지 사용으로 실내온도는 28℃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면서 습도는 30% 이하까지 떨어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환기와 공기청정은 함께 이뤄진다.

패시브하우스나 ZEB에서는 단열성과 기밀성의 향상으로 현열부하는 대폭 감소되나 잠열부하는 거의 그대로이다. 즉 장마철 환경과 유사해지며 에어컨을 틀면 춥고 끄면 꿉꿉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패시브하우스나 ZEB에 기존의 에어컨이 제공하지 못한 쾌적성을 1/3 이하의 저렴한 유지비용으로 해결한 것이다.

작년에 제정된 기계설비법이 내년 2020년에 발효된다. 기계설비는 건물이나 시설물에 설치된 기계·기구·배관 등을 통칭하는데 일반인들이 접하는 냉난방, 환기의 에너지기계설비 및 위생설비가 포함된다.

늦었지만 정말 잘 만든 법이다. 국가 총에너지의 20% 정도가 건물에서 사용된다고 했는데 선진국으로 갈수록 그 비율은 증가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건물에서 낭비되는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허술한 건물 자체도 문제지만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 설비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대충 설계하고 시공하고 나서 건축주에게 넘기고 나면 관심 밖이다.

설치된 이후의 유지관리는 거의 전무하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허비된다. 임대건물이면 비싼 에너지비용을 고스란히 세입자가 지불하는 셈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에서 우수한 설계, 시공, 유지관리를 통해 에너지 낭비를 방지하는 것이 기계설비법의 핵심이다.

에너지절약은 제5의 에너지라고도 한다. 원자력이나 신재생에너지로 생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효율 에너지시스템을 적용하고 합리적인 운전과 적은 유지비용을 통해 화석연료 사용억제 및 온실가스 저감 측면에서 훨씬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설비 및 열에너지에 조금만 더 애정 어린 관심과 정책적인 지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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