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 연구부총장
▲박진호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 연구부총장

[투데이에너지] 최근 석유, 가스 등 전통 화석에너지원뿐만 아니라 원자력, 태양광, 풍력 등 저탄소 에너지원과 관련한 국제 지정학적 변화는 정말 예측이 불가할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지난 수년에 걸쳐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는 미-중 무역갈등, 업친데 겹친격으로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또한 이들을 핑계(?)로 한 세계 주요국들의 신보호무역주의 부활과 글로벌가치사슬(GVC) 재편 움직임 등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2021년 11월 미국은 ‘인프라법안(Infrastructure Investment and Job Act)’을 입법화해 자국 내 인프라(고속도로, 다리, 철도, 공항, 항만, 전력계통 등) 혁신에 향후 10년간 약 5,50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또한 올해 들어서는 이른바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의 제정을 통해 자국 내 저탄소 에너지의 생산과 제조 등을 통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유도하고 있고 이와 동시에 2030년까지 40% 이상의 온실가스 감축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다. 특히, 무려 약 3,690억달러가 에너지안보 강화와 기후변화 대응에 투입될 계획이다.

총 에너지의 약 25~30%를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고 이중 약 40%를 러시아산 파이프라인가스(PNG)로 도입하고 있는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데 이에 대응한 러시아의 천연가스 무기화에 따라 가스 수급에 있어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스와 석유 가격이 급등락하는 등 크게 출렁이고 있고 전반적으로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실정이다. 

EU행정부는 이러한 불안한 가스 수급상황을 완화하고 겨울철 에너지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년 2월말까지 역내 천연가스 소비를 15% 이상 감축하는 선택을 하게 됐으며 중장기적으로는 러시아산 에너지원들에 대한 의존도를 근본적으로 낮추고 에너지 수급불안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일명 ’REpowerEU‘ 법안을 발의한 상태이다. 

에너지안보가 어느새 세계 각국의 에너지정책 설정에 있어 제일 우선순위가 높은 요소로 자리잡게 됐고 이러한 측면에서 대표적인 저탄소 에너지원인 원자력에 대한 평가도 크게 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간 탈원전에 가장 앞장서왔던 독일마저도 원자력발전의 재가동을 검토하고 있으며 동유럽과 중동을 위시한 여러 국가에서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탄소중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지와 약속은 에너지안보의 급부상에도 불구하고 약화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점점 빈번해지고 강해지고 있는 자연재해는 이제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아니고 인류가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하는 지상최대의 과제가 된 것이다. 태양광, 풍력으로 대표되는 재생에너지의 확대를 위한 투자는 신규 투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계속 증가하고 있고 수소경제를 앞당기려는 정부 및 민간차원의 노력도 보다 가속되고 있다. 

국제사회의 이러한 움직임은 일면 괘를 같이 하는 것 같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 중심에 자국 산업과 일자리의 보호라는 명제가 선명히 들어남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이 그렇고 유럽의 ESMC(European Solar Manufacturing Council)를 중심으로 한 역내 태양광 가치사슬 산업 복원계획이 그렇다.
탄소국경조정제도(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CBAM)로 대표되는 관세부과 조치는 이제 온실가스 직접배출에 대한 제한을 넘어 무역거래되는 제품 내에 포함된 온실가스(Embedded CO2)에 대한 관세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어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대두되고 있다. 순수한 민간의 자발적 노력의 형태로 시작된 RE100 선언도 무역장벽으로 성큼 다가와 있는 상황이다.

그 어느 것 하나도 표면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해 보이는 내용은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아직 대부분의 에너지를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고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깊게 분석해보면 이러한 국제 지정학적 위기가 심화될수록 대한민국에는 어느 때보다 큰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양광, 풍력, 배터리, 수소, 원자력 등 탈탄소경제의 구현에 필요한 핵심 에너지원들의 생산과 이를 ICT와 데이터 및 인공지능으로 연결한 스마트에너지 네트워크의 구축에 있어 결국 그 공급사슬은 기계, 화학, 조선, 반도체 등 핵심 제조업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의 에너지산업과 주력산업이 이러한 국제 지정학적 변화의 흐름에 맞춰 얼마나 신속히 혁신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기회의 앞은 긴 머리이나 기회의 뒤는 대머리다’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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