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것을 보거든 ...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초대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해 쏴갈긴 총탄은 모두 여섯발이었다.

그중에서 세발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토의 가슴, 페와 심장을 꿰뚫어 총을 맞은지 30여분만에 그를 절명케 했으며 나머지 세발중 한발은 역시 일본의 거물이며 남만철도(南滿鐵道)이사인 다나까(田中淸次郞)의 발목을 관통시켰다.

바로 그 다나까가 훗날, 이토 저격후 체포될 순간까지 안의사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증언한 기록이 있다.

― 나는 안중근이 총을 쏘고 서있는 모습을 본 순간 마치 신(神)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다나까는 저격현장에 10여분이나 있었기 때문에 안의사를 관찰할 시간이 충분했다며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 총을 쏜 후의 안중근은 태연하고 남자답고 늠름했다. 그때의 광경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세계의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보았지만 모두 안중근 발밑에 미치는데 불과할 뿐이다. 그를 뛰어넘는 훌륭한 사나이는 세계 그 어느 곳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

도대체 안중근 의사의 늠름하고 당당함이 어느 정도였길래 지금 막 이토를 거꾸러뜨리고, 더구나 자신에게까지 총상을 입힌 당사자를 그토록 침이 마르도록 극찬할 수가 있단 말인가.

다나까의 말이 혹시 과장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게 할 정도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나 옥중에서 그리고 사형장 등에서 의연하고 당당했던 안의사의 모습들은 다나까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특히 지난달 26일 안의사 순국 90주년에 즈음해서 발표된 것으로 안의사가 체포된 후 순국할 때까지 통역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진 일본인 소노키 스에키(園木末喜)가 기록한 순국당일의 기록을 통해서도 안의사의 그와같은 모습은 뚜렷해진다.

이 기록은 구리하라라는 전옥이 사형집행의 뜻을 전하자 안의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으며 이어 유언이 없느냐고 하자 ‘아무것도 남길 말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고 했음도 아울러 전하고 있다.

안의사는 재판정에서도 자신의 이토 저격은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위한 전쟁이었으며 의병참모가 적과 싸우다 포로가 된 것이기 때문에 국제법에 붙혀야 할 지언정 일본이 재판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일갈한 바도 있다.

모두가 다 안의사의 용기와 지성을 알 수 있는 장쾌하고 거인다운 헌헌장부의 기개가 아닐 수 없다.

비단, 지난달 26일이 안의사가 순국한 기념일이어서라기 보다 두말이 필요없는 그의 애국심은 물론 비록 32년 짧은 세월이나마 태어나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한결같이 우리에게 보여준 대장부로서 위풍당당하고 씩씩한 기상, 꿋꿋한 절개와 비길데 없는 의인(義人)의 풍도(風度)가 날이 갈수록 그립고 사무치는 세태라 흠모의 정이 절실한 것이다.

군대도 안갔다오고, 세금도 제대로 안낸 자칭 애국인들이 큰일하겠다고 온통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아우성이고, 오만과 무지, 무책임이 장땡인줄 알고 거들먹거리는 세상, 비겁과 비굴이 그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꼬리치는 사회, 잔꾀와 교활이 정도인양 젠체하고 나대는 그런 세상이라 안의사가 남긴 교훈 한귀절이 더욱 뼈저리게 파고든다.

見利思義 見危授命

남만철도에 다나까처럼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일본인들의 청 따라 써준 200여편도 넘는 명문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로운 것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험한 것을 보거든 목숨을 던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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