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기자회견 자리에서였는지 JP를 만난 자리에서였는지 말씀한 정확한 때와 장소는 잠시 까먹었지만 대통령이 연초에 내린 눈을 일러 덕담삼아 복(福)스럽고 길(吉)한 징조가 있을듯한 서설(瑞雪)이라 했다해서 이번 폭설로 농·어촌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피해가 얼만데 그같이 태평한 소리냐고 야당이 꼬집고 나설만큼 참으로 많은 눈이 쏟아졌으며 강추위였다.

그런데 서설이란 표현까지는 그만두고라도 강추위와 함께 수십년만에 몰아닥친 폭설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이 나이에도 아직 철이 덜 든 탓일것이라는 안식구 말이 맞을런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상을 온통 하얗게 한가지 색깔로 덮어버리는 것이 한량없이 좋은 것을 어찌하겠는가.

철이 덜든 탓이라니까 문득 학창시절 눈만 내리면 무슨 큰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외어대던 ‘구르몽’의 시 ‘눈’과 김동명(金東鳴)시인의 ‘답설부(踏雪賦)’가 떠올라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

시몬 눈은 네 맨발처럼 희다 / 시몬 눈은 네 무릎처럼 희다 // 시몬 네 손은 눈처럼 차다 / 시몬 네 맘은 눈처럼 차다 // 눈을 녹이려면 뜨거운 키쓰 / 네 맘을 풀려면 이별의 키쓰 // 눈은 쓸쓸히 소나무 가지 위 / 네 이마는 쓸쓸히 검은 머리카락 밑 // 시몬 네 동생 눈은 뜰에 잠들었다 / 시몬 너는 나의 눈, 그리고 내사랑 눈이 내린다 눈을 맞으며 / 눈을 밟으며 길을 걷는다 / 여인이여 가까이 / 좀 더 가까이 내

곁으로 오라 // 이왕이면 팔을 끼고 걷자꾸나 / 흰눈이 테잎처럼 우리를 감으라, 자 // 흰눈을 밟으며 / 길을 간다…. // 인생의 길위에도 / 흰눈은…. // 아아, 회한(悔恨)이여! / 나는발이시려…

비 오는 날보다 눈 내리는 날 더 사람들의 마음이 맑고 푸근해지고, 다정다감해지는 것은 아마도 눈의 색깔때문이 아닌가 하며 세상에 온갖 지저분한 것들을 순백(純白)으로 덮어 우리들 가슴에 안겨 주기때문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다시한번 어린애같은 생각이지만 눈의 색깔이 붉은 색도 검은색도 그 어느색도 아닌 흰색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싸늘한 첫새벽, 햇빛을 받은 눈밭의 흰색은 때로 더없이 냉랭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 같아 무엇이든 그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어 그만이며, 꿈과 희망을 수놓을 수 있어 좋고 아득한 그 여백의 여유스러움과 안온함의 의미 또한 한없이 좋다.

검은색이 어둠을 뜻하고 있음에 반하여 눈빛은 밝음을 뜻하며, 검은색은 모든 색을 다 지워버리지만 흰색은 모든 색의 기초가 되며 바탕이 되어 주고 검은색이 죽음과 절망을, 흰색은 희망과 생명을 상징하고 검정이 부정과 혼탁의 상징이지만 흰색은 청렴과 청결, 순결의 표상이 아니던가….

소리없이 내리는 하얀 눈, 순백으로 덮혀가는 삼라만상을 보며 슬그머니 이일 저일 지난일과 새해에 해야할 일들을 생각케된다.

2001년, 저 하얀 새 캔버스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릴까, 행여 깨끗한 화폭을 어지럽히고 마는 것은 아닐까 두렵고 설레는 이가 이사람 뿐만은 아닐것 같다.

한해를 살고, 또 한해를 산다는 것도 결국은 하루 하루, 내일을 향해 가는 길이며, 그 내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그려야 한다.

마음 편할 날 없었던 어제, 이미 사라져버린 어제는 이제 잊어버리고 오직 새해만 생각하고 그려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다시 또 최선을 다하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힘을 합쳐 희망을 찾아나서면 반드시 길은 나설것이다.

때묻지 않은 눈송이처럼 깨끗하고 착한 이웃, 열심히 살아가는 이웃과 함께, 부끄럽지 않게 좆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염원하며 내일을 그려나가자고 마음다진다.

이제 이눈이 그치고 녹으면 눈속에 감추어져 있던 깨끗지 못한 세상 속살이 다시 드러날 것이며 세상은 별일 없었던 양 또 그렇게 저렇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채 녹지 않은 눈길을 골라가며 소리없이 다가서는 봄을 느끼며, 꽃보다 아름답고 깃털보다 부드럽게 내리는 한송이 두송이 눈발 저쪽에서 다가서는 따스한 봄을 느낀다.

< 한기전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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