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 연구부총장
▲박진호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 연구부총장

[투데이에너지] 최근 ESMC(European Solar Manufacturing Council)의 발표에 의하면 그간 태양광 가치사슬 제품군 대부분을 중국 등 아시아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던 유럽이 폴리-잉곳-웨이퍼-셀-모듈에 이르는 가치사슬 전 분야의 EU 내 생산을 재개해 2030년까지 100GW 생산규모를 달성하고 장기적으로는 75% 이상을 EU 내 생산으로 담당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invisible) 정책적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태양광 가치사슬 기업들이 엄청난 규모의 캐파 확장과 함께 높은 가격경쟁력을 가지고 세계 거의 모든 국가의 태양광 제조기업들을 초토화시켜 놓은 상황에서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의심이 들 정도의 파격적인 발표이다. 

2020년 말 기준 유럽 태양광제조업은 가치사슬의 업스트림인 폴리실리콘 생산에 있어 세계 약 11%, 실리콘 웨이퍼 생산에서 세계 약 1%, 셀 생산에서 세계 약 0.4%, 모듈 생산에서 세계 약 3%에 불과한 미미한 수준(인버터만 세계 약 25% 점유)인데 어쩌면 무모한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한 전략 수립에 그치지 않고 이미 유럽의 Meyer Burger, Enel Green Power, REC 등 기업들이 가치사슬별로 구체적인 생산 확대 계획을 발표하고 있어 실제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프랑스의 태양광 스타트업 Carbon은 마크롱 대통령의 지난 2월의 원자력 확대 방안에 바로 이어 나온 태양광 육성 선언에 발맞춰 2025년까지 무려 5GW의 태양광 패널을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수입산 소재부품(셀 등)을 써서 태양광 패널을 단순 조립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유럽 내에서 생산되는 폴리실리콘, 이를 사용한 잉곳과 웨이퍼, 그리고 또한 이를 사용한 셀과 모듈을 경쟁력있는 원가로 생산하겠다는데 있다. 즉 태양광 패널의 EU국산화율도 크게 높이겠다는 것이다. 

의도는 좋지만 값싸고 품질도 좋은 중국산과 과연 경쟁할 수 있을까? EU 전략의 배경을 좀 더 살펴보면 수긍되는 측면이 있다. 최근 들어 모듈 가격이 급락하면서 시스템 비용에서 차지하는 모듈의 원가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고 장거리 물류비용 등을 고려할 때 역내 생산이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탄소발자국을 중요시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도입에 따라 이미 청정에너지가 크게 확대돼 있는 EU제조업의 경쟁력도 제고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럽의 태양광 기술에 대한 자신감도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 대규모 발전용 태양광 패널의 생산보다는 소량 또는 대량 맞춤형 생산 제품에 중점을 둔 것도 주목할만 하다. 이른바 건물통합형태양광(BIPV), 차량통합형태양광(VIPV), 수상태양광(FPV), 영농형태양광(APV) 등과 같은 통합형 태양광(Integrated PV) 패널의 제조와 보급 확대를 주요 목표로 잡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태양광제조업은 어떠한가? 필자가 잠시 대학을 떠나 정부의 태양광 PD로 파견근무를 하던 2012년 당시 ‘태양광백서’를 집필한 적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그 자료를 다시 펼쳐 현재 상황과 비교해 봤다. 2011년 당시 연간 국내 태양광 설치시장은 0.156GW 규모(세계 시장은 28GW)에 불과했는데 10년 뒤인 2020년에는 4.12GW(세계시장은 145GW)로 무려 26배 증가했다. 아이러니하지만 2011년 당시 국내 태양광 가치사슬 산업군은 폴리실리콘분야에서 OCI를 비롯한 5개사 이미 진입한 상태였고 한화케미칼 등 4개사가 진입 예정으로 총 9개사, 잉곳·웨이퍼분야는 웅진에너지 등 6개사가 진입했고 실트론 등 4개사가 진입 예정으로 총 10개사, 셀분야는 신성솔라, LG전자 등 총 13개사, 모듈은 10개사가 진입했거나 진입 예정이었다. 태양광산업의 장기전망을 밝게 본 국내 주요기업들 사업에 뛰어들어 각축을 벌이는 춘추전국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렇다면 현재 국내 태양광제조업 현황은 어떤가? 폴리실리콘과 잉곳·웨이퍼분야는 국내 생산이 완전히 중단되어 사업을 접었거나 생산현장이 해외로 이전됐으며 셀분야는 최근 LG전자의 사업중단 선언 이후 한화큐셀과 현대에너지솔루션 등 2~3개 업체만 남은 상태이고 모듈제조업만이 10여개 업체 중심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시스템 설치와 발전사업 중심으로 그 축이 이동돼 있다. 보급이 크게 확대된 것에 비해 국내 제조업은 거의 괴멸 직전인 상황으로 그간 EU, 미국, 일본 기업들이 무너져내리는 동안 잘 버텨오던 국내 제조기업들도 생존의 기로에 선 것이다.

특정 산업분야에서 공급사슬이 한번 무너지고 나면 다시 살리기가 쉽지 않다. EU의 태양광 가치사슬 산업 전 분야에 걸친 생산 재개 움직임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태양광 발전시스템 보급목표 수치 달성에만 집중하지 말고 기술력을 바탕으로 좋은 일자리와 지수적으로 커가고 있는 세계시장에서 국부를 창출할 수 있는 국내 제조업의 역량을 다시 찾아오는 노력이 정말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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