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개최되고 있다. 원자력연구소가 1959년에 개소하였으니 원자력개발의 역사가 50년인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Atoms for Peace’를 제창한 것이 1953년이었으니 우리나라는 원자력에 관한한 Early Adapter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적으로 원자력발전 6위국이 됐으며 원자력기술자립을 통해 원전수출을 추진하고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추진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국민들의 높은 교육열과 잘살아보자는 의욕이 뒷받침 된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지만 국민들의 이런 잠재력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도록 한 것은 국가 지도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지도자는 미래를 먼저 내다보고 그 미래를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목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원자력과 이승만 대통령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은 다음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1951년 초 한국전이 한창일 때 이 대통령은 미군 제10군단장인 밴프리트 장군에게 전쟁이 끝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식량, 물,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식량은 사오거나 빌려올 수도 있지만 물과 에너지는 그럴 수 없으니 화천지역을 꼭 탈환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이 대통령의 애국심과 열정에 탄복한 밴프리트 장군은 결국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화천 지역을 탈환함으로써 물과 전기를 확보했다.

이렇듯 에너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원자력에너지의 가능성을 설명해준 사람은 미국인 Walker L. Cisler이다. 미국 에디슨 전력회사에서 회장을 역임하였고 2차 대전 후에는 아이젠하워 장군 휘하에서 유럽전력계통 복구를 총지휘한 인물이다.

1956년 7월 시슬러씨는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해 원자력은 화석연료의 300만배 에너지를 낼 수 있으며 자원빈국인 한국에 적합한 기술집약적인 ‘머리에서 캐는 에너지’라고 소개하면서 이 분야를 관장할 기구를 만들고 기술인력을 양성하도록 권고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시슬러씨의 권고를 받아들여 곧바로 원자력발전을 향한 준비를 지시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56년에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과가 신설되었고 다양한 훈련프로그램을 만들어 10년간 240여명에 달하는 원자력 전문인력을 배출하였는데 이 인력들이 원자력발전 도입 초기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당시 수출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1인당 경비가 6,000달러인 알곤국립연구소 프로그램 등에 훈련생을 보낸 것은 원자력인력양성에 쏟아 부은 이 대통령의 열정을 알 수 있다.

당시 정부 조직 전체 1,2급 공무원이 110여 명이었는데, 원자력원에 소속된 1,2급 공무원만 무려 20명이었다는 점을 볼 때 원자력 인력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연구원의 월급이 일반 공무원에 비해 3배에 달할 정도였으며 원자력과에 배정된 예산도 1억4,000만원으로 당시 중앙공업연구소의 연간 예산이 약 200만원 정도였으니 예산을 통한 지원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시슬러씨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지금 원자력프로그램을 시작하면 그 꿈이 20년 후에는 이루어질 것’이라 말했는데 그의 예언대로 1978년 4월 고리1호기가 준공되었다.

이제 에너지 분야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고 있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중심으로 탄소를 제로화시키는 녹색경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원자력 걸음마가 시작되었듯이 녹색강국 Korea를 만들기 위한 발걸음이 정부주도로 시작되고 있다.

원자력불모지에서 반세기 만에 세계 6위권의 원자력 강국을 만들었던 것처럼 앞으로 20년 후 녹색경제를 향한 대통령의 열정이 꽃피우는 것을 또 한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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