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에너지 안후중 기자]
미국 에너지부(DOE)가 15일(현지시간)부터 대한민국을 '민감 국가(Sensitive Country)' 리스트(SCL)에 포함하여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원자력 산업 전반에 걸쳐 심각하고 다층적인 영향이 현실화되고 있다. 동맹국인 한미 양국 간 원자력, 에너지, 첨단 기술 등 과학기술 분야의 심도 있는 협력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미국 'DOE Order 142.3B' 발동…R&D 협력 '심각한 차질' 넘어 '일상적 장애' 우려
이번 '민감 국가' 지정의 핵심 근거가 되는 미국 에너지부 내부 규정 'DOE Order 142.3B'는 DOE 시설, 정보, 기술에 대한 외국 국적자의 접근을 엄격히 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특히 '민감 국가'로 지정된 국가의 국민이 DOE 산하 17개 연구소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최소 45일 전 사전 신청은 물론, 강화된 신원 조회를 거쳐야만 한다. 이는 기존의 간소화된 절차와 비교했을 때 상당한 행정적 부담과 시간 지연을 초래하며, 한미 공동 연구개발(R&D)에 심각한 제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미국 측 인사 역시 한국을 방문하거나 접촉할 때 추가적인 보안 절차가 필요하게 되어,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 관계인 한미 양국 간 일상적인 과학 협력에 실질적인 장애 요인이 발생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한국은 이번 목록에서 북한 등 테러지원국, 중국, 러시아 등 위험 국가보다는 낮은 등급인 '기타 지정 국가'로 분류되어 우려 수위가 낮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이는 실질적인 협력 과정에서 불이익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첨단 원자로 기술 개발, 사용후핵연료 관리 기술 확보(파이로프로세싱 등), 인공지능(AI) 및 양자컴퓨팅 기술 등 미래 에너지 및 첨단 과학 분야에서 미국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와의 협력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이번 접근 제한 조치는 공동 연구의 속도를 늦추고, 한국 연구진의 참여 기회를 축소시키는 등 실질적인 어려움을 야기할 수 있다. 미국 에너지부는 대외적으로 "현재 한국과의 양자 간 과학·기술 협력에 대한 새로운 제한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강화된 사전 신원 확인 절차 등은 협력의 효율성을 저하하고, 연구자들의 교류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한국형 원전 APR1400 수출 '험난한 가시밭길' 심화…웨스팅하우스 분쟁 '재발화' 넘어 '정부 차원 부담' 가중
한국 원자력 산업의 핵심 동력인 원자력 발전소 수출에도 '민감 국가' 지정은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특히, 한국이 독자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APR1400 원전 설계에 미국의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 Electric Company)의 원천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는 논란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웨스팅하우스는 APR1400 수출 시 자사의 지식재산권 침해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 바 있으며, 비록 최근 양사 간 분쟁이 합의로 일단락되었지만, APR1400 수출을 위해서는 여전히 미국 정부의 수출 통제(10 CFR Part 810) 승인을 받아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민감 국가'로 지정됨에 따라, 미국 정부의 수출 승인 심사 과정이 더욱 엄격해지고 복잡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국 정부는 Part 810 승인 시 해당 수출이 "미국의 국익에 반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요 기준으로 판단하는데, '민감 국가' 지정은 이러한 판단 과정에서 추가적인 검토 요소로 작용하여 승인 절차를 지연시키거나, 더 나아가 불허 결정으로 이어질 위험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이는 한국 원전 수출에 있어 중대한 장애물로 작용하며, 체코 원전 수주 등 한국 원전의 해외 진출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글로벌 동맹국인 한국을 과학 협력에서 북한 등과 사실상 비슷하게 취급하는 것은 한미 동맹에도 상징적인 의미에서 타격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핵연료 공급망 '안정성 위협' 증폭…러시아 의존도 탈피 노력에 '불확실성' 가중
원자력 발전의 필수 자원인 핵연료 공급망에도 '민감 국가' 지정은 잠재적인 불안 요인으로 더욱 크게 작용할 수 있다. 한국은 현재 핵연료 전량을 해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과거 러시아로부터 상당 부분을 수입해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지정학적 리스크가 부각되면서 공급망 다변화의 필요성이 절실해졌고, 이에 한국수력원자력(KHNP)은 미국 Centrus Energy와 장기 저농축 우라늄(LEU) 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등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비록 '민감 국가' 지정이 핵연료 자체의 수입 계약이나 NRC의 수입 허가 절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낮지만, 핵연료 성능 개선, 신형 핵연료 개발 등과 관련된 미국 에너지부와의 기술 협력 및 공동 R&D에는 'DOE Order 142.3B'에 따른 접근 제한 규정이 적용될 수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핵연료 공급망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으며, 러시아 의존도를 낮추려는 한국의 노력에 예상치 못한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더 나아가, 미국이 핵연료 공급의 안정성을 지렛대 삼아 '민감 국가' 지정 해제 협상에서 다른 전략적 또는 안보적 요구 사항을 한국에 제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산업계 '총력 대응' 절박…외교 채널 풀가동 및 기술 경쟁력 확보 '최우선 과제'
미국의 갑작스러운 '민감 국가' 지정에 대해 한국 정부는 "관계부처와 함께 미국 에너지부와 국장급 실무협의 등 적극적인 교섭을 지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미 지난달 미국에서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을 만나 한국의 민감 국가 리스트 포함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로 합의한 바 있으며, 양국은 이를 위한 실무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측은 "민감국가 해제와 관련해서는 미측 내부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것으로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어, 단기간 내에 해제될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미국 에너지부를 비롯한 관련 부처에 이번 지정의 부당함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한미 동맹의 중요성과 원자력 협력의 상호 이익을 강조하며 지정 철회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국내 원자력 산업계와 연구기관은 미국의 보안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미국 기술 및 정보 취급·관리에 대한 내부 통제 시스템을 강화하고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핵심 기술의 자립도를 높이고, 미국 외 다른 국가와의 기술 협력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등 다각적인 전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또한, 원전 수출 전략을 재점검하고,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을 강화하여 미국 정부의 수출 통제 승인 절차에 선제적으로 대비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원자력안전위원회 등 관련 부처 간 긴밀한 공조 체계를 구축하여 일관되고 효율적인 대미 협상 및 국내 대응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