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에너지 이상석 기자] 지난 4월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마비시킨 대규모 정전 사태는 '과전압(overvoltage)'이 주된 원인이라는 스페인 정부의 공식 조사 결과가 나왔다.
스페인 생태전환부는 17일(현지시간) 정전 사태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고, 전력망 내 과전압이 연쇄적인 시스템 셧다운을 야기하면서 국가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에서 통신 두절, 열차 운행 중단, 상점 영업 정지, 주요 도시 정전 등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다.
사라 아게센 생태전환부 장관은 “정전 사태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며 “당일 전력망은 충분한 전압 제어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고 밝힌 데 이어 “전력망이 이론적으로는 과전압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구조이지만, 해당 시점에는 프로그래밍 오류와 과도한 자동 차단 조치 등으로 제어 불능의 연쇄 반응이 발생했다”고 덧붙였다.
과전압은 공급 과잉이나 낙뢰, 또는 보호 장비의 미작동 등으로 인해 전력망에 과도한 전압이 흐르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보호 시스템이 작동해 일부 구간을 자동 차단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규모 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스페인 전력망 운영사인 REE와 일부 민간 발전사들이 자사 설비 보호를 위해 “부적절하게 발전소 연결을 해제(disconnect)”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킨 것으로 지적됐다. 아게센 장관은 “사전에 과전압 흡수를 위한 대응 조치가 이뤄졌다면 대규모 정전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한편 이번 조사 결과는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원인 분석과 향후 개선책 제시를 위한 것임을 정부는 강조했다. 전력망 운영사 책임론에 대해서는 “보고서는 재판이 아닌 분석 목적의 문서”라고 선을 그었다.
앞서 4월 28일 발생한 정전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은 물론 프랑스 남서부 일부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생태전환부 주도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사실관계 확인 전까지 추측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한 바 있다.
사건 직후 사이버 공격이나 재생에너지 과잉 생산에 따른 과부하가 원인일 수 있다는 추측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이를 공식 부인했다. 아게센 장관은 “사이버 위협이나 재생에너지 과잉과는 무관하다”면서도 “전력망 보안 시스템 전반에서 일부 취약성과 부족한 대응 역량이 확인됐다”고 인정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스페인 우파 야당은 사회당 주도의 현 정부가 원자력 발전을 축소하고 재생에너지 의존도를 높인 점이 정전 사태의 근본 배경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정부 측은 “신재생 과잉이나 원자력 부족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점이 명확히 밝혀졌다”고 반박했다.
보고서는 향후 대책으로 △전력 운영사의 감시 및 규제 강화 △전력망 용량 증설 △프랑스 및 모로코 등 인접국과의 전력 연계 확대 등을 권고했다. 실제로 이번 정전 복구 과정에서도 프랑스와 모로코로부터의 전력 지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유럽투자은행(EIB)은 지난 16일 프랑스와 스페인을 잇는 대규모 전력 연결망 사업에 16억유로의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양국 간 전력 교환 용량은 두 배 이상 확대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