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에너지 윤철순 기자] 정부가 22일 발표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의견조사 중간 결과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피해자의 84.2%가 ‘합의를 통한 문제 해결’에 동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수치만 보면 집단 합의의 길이 열린 듯 보이지만, 이 데이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전체 피해자 5413명 중 설문에 응답한 이는 1965명, 응답률은 36.3%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체 피해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의견을 ‘피해자 대다수의 합의 희망’으로 해석하는 건 과도한 일반화로, 자칫 또 다른 갈등과 후유증을 낳을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당장 피해자들 사이에서 조사의 정당성과 공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온다. 특히 조사 방식이 문자메시지나 우편 발송에 의존한 점, 답변 기한이 촉박했던 점, 설문 내용의 민감성과 복잡성에 비해 충분한 설명이 없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참여 장벽을 높였다는 지적이다.
‘선 설문 후 동의?’ 절차적 정당성 의문
이번 조사는 피해자와 유족을 대상으로 △합의 희망 여부 △대표 선출 방안 △선거관리위원 참여 의사 등을 묻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환경부는 “집단 합의에 앞서 피해자의 자발적 의사를 수렴하기 위한 것”이라 강조하지만, 실제 진행 과정에서는 피해자의 실질적 의사 반영이 어려운 구조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특히 환경부는 이번 합의가 이뤄질 경우 “피해자가 향후 손해배상청구를 포기하고, 피해구제법에 따른 구제급여도 더 이상 지급받지 않게 된다”고 명시했다. 이른바 ‘최종적 합의’를 통해 법적 분쟁을 종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응답률이 36%에 불과한 상황에서 이를 근거로 전체 피해자의 의사인 양 집단합의 구조를 설계하는 건 시기상조라는 우려가 나온다.

또 다른 피해자 갈등 키우나
설문에서 ‘합의 희망’이라 답한 1655명도 실제 합의에 응할지 여부는 아직 미정이다. 향후 구성될 합의위원회가 제안하는 보상 기준과 내용에 따라 입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부도 “설문 결과와 관계없이 피해자는 이후 합의 기준을 보고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밝혔지만, 이미 정책 방향이 ‘합의 중심’으로 기울어진 만큼 비동의자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540명에 달하는 피해자가 선거관리위원 참여 의사를 밝힌 점은 피해자 스스로도 이번 절차에 대해 신중한 감시와 견제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음을 방증한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응답률이 낮은 설문 결과를 바탕으로 ‘집단 합의’를 밀어붙인다면, 피해자 간 갈등과 신뢰 붕괴는 불가피하다.
‘또 다른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진정 피해자를 위한 제도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문제의 ‘정리’를 위한 정무적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후유증 막으려면 ‘속도’보다 ‘신뢰’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우리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정부는 2023년 대법원이 “국가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판결한 이후부터 피해구제 강화에 나서고 있지만, 그 과정은 여전히 피해자와 유족에게 상처를 덧입히고 있다.
이번 집단합의 추진도 마찬가지다. 설문은 수단일 뿐이며, 결론이 아니다. 피해자 대다수의 동의 없는 합의는 새로운 사회적 논란과 분열만 낳을 뿐이다. 피해자의 동의는 ‘숫자’가 아니라 ‘신뢰’ 위에 세워져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조속한 마무리가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사회적 책임의 자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