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에너지]
서방의 자국 내 석유 개발권 독점에 대항하기 위해 1960년 바그다드에서 5개국이 모여 결성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지금까지도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핵심 권력 기구로 자리하고 있다.
현재 12개 회원국이 세계 석유 생산의 약 37%, 확인매장량의 79%를 통제하며, 러시아, 멕시코 등이 포함된 OPEC+ 기준으로는 로 22개국이 글로벌 생산의 약 47%를 조율한다. 석유파동 이후 비OPEC 국가의 원유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OPEC의 시장 지배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2020년 팬데믹 시기에 일일 970만 배럴 감산으로 가격 붕괴를 막아내며 시장 지배력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석유 메이저 기업들과 저장소 보유국들이 이산화탄소 포집 및 저장(CCS) 인프라를 공격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대표적인 석유 메이저인 엑손모빌은 1,400만 톤 이상의 연간 CO2 저장 용량을 확보하여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또 다른 메이저인 Shell과 BP는 노르웨이의 노던 라이츠 프로젝트를 통해 유럽 저장 시장을 선점했다. 2024년 가동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초기 연 150만 톤에서 2028년 500만 톤으로 확대될 예정이며, 유럽 기업들로부터 프리미엄 가격을 받고 있다.
영국과 중국, 호주,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CCS 저장소 확보와 사업 지원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2024년 기준 전 세계 CCS 프로젝트 파이프라인은 628개로 전년 대비 60% 증가했다.
CCS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에서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명시하고 있는 수단으로, 전기화가 근본적으로 어렵거나 너무 높은 비용이 드는 분야의 탈탄소화와 바이오에너지, 직접 공기 포집과 연계한 탄소 제거 수단으로 활용될 것이다.
그런데 CCS가 형성할 탄소 시장은 경제적인 저장소의 희소성과 불균등한 분포라는 근본적인 취약성을 지닌다. 러시아, 미국, 중국, 브라질, 호주와 같은 국가는 높은 잠재력을 보유했지만, EU나 인도 등 CCS의 주요 수요국은 심각한 제약에 직면할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북해 지역에 2035년까지 EU 포집 배출량의 74%를 저장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노르웨이와 영국이 이 지역 용량의 90%를 통제하여 OPEC의 중동 지배력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송 인프라도 추가 병목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되며, 덴마크는 연 4,000만 톤의 CO2 수입으로 360억 유로 수익을 예상하는 연구도 존재한다. 즉, 과거 원유와 천연가스 보유국이 누렸던 “자원 지대”가 CCS 저장 부국의 경제적 지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저장소 빈국이 직면한 취약성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한국의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상 CCUS 감축량은 연간 1,120만 톤이며, 그중에서 480만 톤을 CCS를 통해 감축하는 것으로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계획된 국내 저장소는 고갈된 동해가스전을 활용하는 연간 120만 톤 외에는 없으며, 그마저도 아직 실증사업을 위한 재원 마련을 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 저장소 추가 확보를 위한 지속적인 탐사와 함께 해외 저장소 확보에 나서야 하는데, 이를 위한 정부 차원의 계획이 아직은 안갯속이다.
아직은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지만, 만약 탄소 저장소를 통제하는 국가들(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같은 현재의 화석연료 생산국들)이나 석유 메이저 기업들이 기후 제약에 직면한 국가들로부터 최대의 지대(rent)를 얻어내고자 한다면, 이들은 저장소 공급을 제한하거나, 접근을 차별하거나, 정치적 양보를 요구할 수 있다. 즉, OPEC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탄소 시장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한국이 이러한 지대 추구 행위에서 자유로워질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전 세계 주요 유망 저장소들이 2025~2030년 사이에 대부분 할당될 것으로 예상되며, 선발주자들은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는 반면 후발주자들은 용량 제약과 프리미엄 가격에 직면할 것이다. 이 골든타임을 놓치면 저장소 의존국들은 2030년 이후 높은 저장 비용, 좌초 자산화, 산업 경쟁력 손실로 상당한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난 2024년 이산화탄소저장활용법을 제정하며 CCS 생태계 조성과 지원에 필요한 법률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저장소 확보를 위한 노력은 사실 미흡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CCS는 화석연료의 수명 연장 수단이 아니다. 재생에너지 중심 탄소중립 여정 가운데에도 꼭 필요한 탄소 제거 수단이며 한국과 같은 탄소 집약적 산업구조를 지닌 국가에는 빼놓을 수 없는 탄소중립 옵션이다. 국회와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한국이 후발국에 머무르게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