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8월 25일,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왼쪽에서 세번째)가 경기 가평군수 등과 함께 청정계곡 현장(연인산 용추계곡)을 방문했다./ 경기도 제공
지난 2020년 8월 25일,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왼쪽에서 세번째)가 경기 가평군수 등과 함께 청정계곡 현장(연인산 용추계곡)을 방문했다./ 경기도 제공

[투데이에너지 윤철순 기자] 지역난방 도입 40년. 집단에너지의 근간이 된 열병합발전소와 열 수송관이 줄줄이 ‘수명 만료’ 시점에 도달하고 있는 가운데, 지역주민의 삶을 지탱해 온 기반시설 정비·현대화 시도가 ‘님비(Not In My Back Yard, NIMBY)’ 벽에 부딪히고 있다.

실제 각 지자체 곳곳에선 “그동안 피해 봤으니 보상하라”, “이참에 냉난방 요금 면제하라”는 요구가 쏟아진다. 공공 인프라의 현대화가 일부 주민들에겐 ‘돈벌이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전국 곳곳 '지뢰밭' 열수송관...사고는 예고된 현실
지난해 서울 양천구, 경기 안양시에서 발생한 열수송관 사고는 단순한 배관 파열이 아니었다. 지하에 묻힌 지 수십 년 된 배관이 임계점을 넘었다는 경고였다. 서울에서만 58%가 노후 배관으로 분류됐고, 공급 중단으로 수만 세대가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수송관 교체는 요원하다. 열수송관 1km 교체에 5억~6억원가량이 소요되지만, 서울에너지공사의 연간 교체 예산은 약 100억원. 이 속도라면 58%의 노후관을 모두 교체하는 데만 10년 이상 걸린다.

◇교체는커녕 설비 현대화도 ‘님비’에 발목
상황이 이쯤 되면 새로운 고효율 설비로 대체하거나 열공급원 신설에 나서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여기엔 주민 반대라는 또 다른 벽이 기다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 마곡의 서남집단에너지시설 2단계 사업이다. 2017년 1단계 완공 후 2단계로 열병합발전까지 확대할 계획이었지만, 민영화 논란과 더불어 “공해 유발 시설 반대”, “전기·가스 요금 면제하라”는 목소리까지 커지면서 답보 상태에 놓였다.

성남 분당발전본부 현대화도 마찬가지다. 30년 넘은 노후시설을 최신식 설비로 교체하려 했지만 일부 주민들은 불법 증축 과태료 대납, 냉난방 요금 면제, 피해보상까지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공기관이 사유화된 집단요구에 휘둘리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열 수송관 매립 시공./ 투데이에너지 자료사진
열 수송관 매립 시공./ 투데이에너지 자료사진

◇교체 안 하면 사고, 교체하자니 반대
노후 인프라는 그대로 두면 사고로 이어진다. 사고가 나면 해당 지역주민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피해를 입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 피해를 봤으니 보상 없인 안 된다”는 식의 주장에 집단에너지사업자는 물론, 지자체와 정부까지 난감해한다.

물론, 과거의 배출이나 소음 등으로 불편을 겪은 지역주민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시설은 공공 인프라다. 집단에너지업계 전문가들은 “개별 주민이 집단적 이익을 위해 공공사업을 저지하는 상황은 명백한 사회적 손실”이라고 지적한다.

더욱이 집단에너지 공급 지역은 법으로 지역난방 사용이 의무화돼 있다. 신도시의 열 수요는 계속 늘어나는데, 신규 시설은 ‘님비’로 가로막히고 기존 시설은 수명을 다하고 있다. 공급은 줄고 수요는 느는 ‘역전 현상’이 이미 진행 중인 것이다.

◇‘이재명 式 계곡 정비’ 모델‘ 공공 인프라 도입 대두
해결책은 분명하다. 정부와 지자체가 '눈치 보기'를 멈추고 법과 원칙에 따라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다. 특히, 선출직인 지자체장과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주민들과 만나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경기지사 시절 불법 계곡 영업장을 해결한 ‘불편해도 원칙대로’ 방식이 이 지점에서 요구되는 건, 단지 “공공의 이익이 몇몇 주민들의 ‘과도한 요구’에 발목이 잡혀선 안 된다”는 지적 때문만은 아니란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특히, 특정 주민의 이익이 공공 전체의 안전보다 우선시돼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지역난방 설비 현대화는 전력과 열을 동시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국가 기간 인프라 사업이다. 지자체는 선제적 지원과 주민 설득에 나서야 하며, 정부는 예산 지원과 법적 근거를 정비해야 한다.

한국남동발전 분당발전본부(위) 전경과 현대화사업 조감도(아래)./ 한국남동발전 제공
한국남동발전 분당발전본부(위) 전경과 현대화사업 조감도(아래)./ 한국남동발전 제공

◇“이기주의 아닌, ‘유치경쟁’ 되도록 제도 바꿔야”
장기적으론 ‘인센티브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다. ‘에너지 자립률에 따른 요금 차등제’가 하나의 해법이다. 발전소를 유치한 지역엔 전기·가스요금 감면 등 혜택을 부여하고, 외부 전력만 소비하는 지역은 송전비를 포함한 높은 요금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이는 이 대통령의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인식의 틀’이기도 하다.

전력 요금도 마찬가지다. 현재 지역별 전력 자립률 격차는 최대 200% 이상인데, 요금은 똑같다. 지방은 생산만 하고 수도권은 소비만 하는 ‘기울어진 운동장’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지역 이기주의는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정비, ‘돈벌이 기회’ 아냐...공공안전은 모두의 책임
기후위기에 따른 재생에너지 확대는 거스를 수 없는 전 지구적 현상이다. 집단에너지는 최근까지의 냉난방 시스템 중에서 가장 친환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방식을 통해 냉난방을 이용하는 가구 수는 이미 전체 가구의 20%를 넘어섰다.

지금보다 더 진보된 지역난방 기술이 언제 어떻게 나올진 모르나 현 상황에서 노후화된 집단에너지 설비의 현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지금처럼 교체도 못하고, 신설도 막히고, 보상만 요구하는 방식이라면 10년 후 대한민국의 지역난방 체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공공시설 정비가 ‘님비’에 막혀 ‘돈벌이 수단’이 되는 지금의 분위기를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정부가 나서 주민을 설득하고 제도로 바로잡아야 한다. 공공과 주민, 정치권 모두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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