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에너지 안후중 기자]
체코 원전 수주라는 쾌거 이면에 숨겨졌던 비밀 합의의 대가가 공개되며 원자력 산업계에 큰 파장이 일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전력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체결한 계약으로, 한국은 원전 1기를 수출할 때마다 약 1조 원이 넘는 비용을 50년간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단순한 지식재산권 분쟁 해결을 넘어, 한국 원자력 산업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드러난 ‘1조 원짜리 악수’
19일, 국내 언론 보도를 통해 지난 1월 극비리에 체결된 합의의 세부 내용이 알려졌다. 계약의 핵심은 충격적인 재정적 의무다.
합의에 따라 한국 기업은 원자로 1기를 수출할 때마다 웨스팅하우스로부터 6억 5000만 달러, 우리 돈 약 9000억 원 규모의 기자재와 용역을 의무적으로 구매해야 한다. 여기에 기술 사용료, 즉 로열티로 1억 7500만 달러(약 2400억 원)를 별도로 내야 한다. 결국 원전 1기 수출 시 총 8억 2500만 달러, 약 1조 1400억 원을 웨스팅하우스에 보장해주는 셈이다. 이 의무는 향후 50년간 유효하다.
더 큰 문제는 미래 기술에 대한 통제권이다. 합의문에는 한국이 독자 개발한 소형모듈원전(SMR)을 수출할 경우, 사전에 웨스팅하우스의 ‘기술 자립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고 알려졌다. 비평가들은 이를 미래 SMR 시장에서 웨스팅하우스가 한국의 시장 진입을 통제하는 ‘독소 조항’이라고 지적한다.
논란이 커지자 윤석열 정부가 단기 성과에 집착해 ‘굴욕 계약’을 맺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한수원 관계자들은 “상호 비밀유지 협약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4조 원짜리 계약 앞둔 ‘절박함’
이번 합의는 2024년 7월 따낸 체코 두코바니 원전 사업을 지키기 위한 절박함에서 비롯됐다. 약 24조 원 규모의 이 사업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이후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입찰에서 탈락한 웨스팅하우스는 즉각 법적 공세에 나섰다. 한수원이 원천 기술 이전 권한이 없다며 체코 반독점사무소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로 인해 2025년 3월로 예정됐던 최종 계약에 제동이 걸렸다.
최종 계약 시한이 다가오면서 분쟁 해결은 프로젝트 성사의 최대 관건으로 떠올랐다. 계약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는 절박함은 웨스팅하우스에 막대한 협상력을 안겨주었다. 결국 웨스팅하우스는 경쟁에서 패배하고도 법적 분쟁을 무기로 한국의 모든 원전 수출에서 막대한 이익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반복된 역사, UAE의 선례
이러한 분쟁은 처음이 아니다. 한국형 원전 APR-1400은 웨스팅하우스가 인수한 미국 기업의 설계를 기반으로 한다. 2009년 UAE 바라카 원전 수출 당시에도 웨스팅하우스는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한국은 상당한 기술자문료와 핵심 기자재 공급 지분을 넘겨주는 방식으로 분쟁을 해결했다. 이 선례가 15년 뒤 더 큰 규모로 반복된 것이다.
‘파트너십’ 포장 속 ‘불평등 계약’
올 1월 합의 발표 당시, 관련 당사자들은 모두 긍정적 입장을 내놓았다. 웨스팅하우스의 패트릭 프래그먼 CEO는 “협력의 기회를 기대한다”고 밝혔고 , 한국전력 김동철 사장은 “법적 분쟁에 따른 불확실성을 해소했다”고 말했다. 한국수력원자력 황주호 사장 역시 “더욱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번에 드러난 계약의 실체는 평등한 파트너십이 아닌, 한쪽으로 기울어진 비대칭적 관계였다. 이는 체코 계약 확보라는 큰 목표를 위해 한국이 장기적인 재정 부담과 기술 주권의 일부를 양보하는 것을 양국 정부가 승인한 결과로 해석된다. 이 합의로 미국 웨스팅하우스는 기술과 정치적 영향력을, 한국 한수원은 시공 능력을 제공하는 비대칭적 공생 관계가 탄생했다.
이번 합의로 한국은 독립적인 원전 수출 경쟁자에서 미국 주도 파트너십의 협력자로 위상이 재편되었다. 이는 향후 50년간 한국 원자력 산업의 수출 전략과 수익성, 기술 주권에 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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