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원자력발전소 해체 시장이 한국 원자력 산업계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1970~80년대 집중 건설된 미국 원전들의 수명 만료와 조기 폐쇄로 형성된 ‘해체 물결’이 연간 32억 달러 규모의 거대 시장을 창출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기술력을 보유한 한국 기업들에게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최근 고리1호기 해체 승인과 현대건설-Holtec 파트너십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 원자력 생태계가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업계 전문가들은 “고리1호기 해체 프로젝트의 성공적 완수가 한국의 글로벌 해체 시장 진출을 좌우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편집자

미국 원전 해체 시장은 과거 유틸리티 기업이 직접 해체를 담당하던 전통적 모델에서 탈피, 해체 전문기업이 원전 소유권과 해체 충당금, 모든법적 책임을 일괄 인수하는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되고 있다. 이 새로운 모델의 핵심은 유틸리티의 ‘골칫거리 부채’를 전문기업의 ‘수익성 자산’으로 탈바꿈 시키는 데 있다. Holtec International, Orano, EnergySolutions 등 소수 전문기업들이 각자의 핵심 역량을 바탕으로 시장을 과점하고 있으며, 이들은 단순한 철거업체가 아닌 복잡한 금융공학과 리스크 관리 능력을 갖춘 통합 솔루션 제공자로 진화했다.

원전 해체의 성패는 결국 방사성 폐기물을 얼마나 경제적으로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샌 오노프레 원전의 44억 달러부터 메인 양키 원전의 5억6800만 달러까지, 프로젝트 비용이 최대 8배까지 차이 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EnergySolutions가 유타주 클라이브에 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을 직접 소유해 막대한 원가 경쟁력을 확보한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폐기물 처리 및 처분 경로를 통제하는 기업이 해체 시장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해체 기술 자체도 고도화되고 있다. 메인 양키 원전에서 세계 최초로 적용된 제어 발파 기술, 3D 모델링과 VR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작업 최적화, 그리고 AI 기반 프로젝트 관리 등 첨단 기술이 현장에 속속 도입되고 있다.

한국의 강점과 약점, 기술력 vs 경험 부족

한국은 미국 해체 시장 진출에 유리한 조건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세계적 원자로 제작 기술, 현대건설의 검증된 원전 시공능력,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의 38개 기초 기술과 한국수력원자력(KHNP)의 58개 상용급 해체 기술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결정적 약점도 존재한다. 상업용 대형 원전 해체 실적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연구용 원자로 해체 경험은 있으나, 수백억 원 규모의 대형 상업 원전 해체 프로젝트를 주도한 경험 부족은 미국 시장에서 주계약자로 인정받기 어려운 핵심 장벽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현대건설과 Holtec International 간의 협력은 한국 원자력 산업 전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대건설이 자사 인력을 인디언 포인트 원전 해체 현장에 파견해 실무 경험을 쌓고 있는 이 파트너십은 단순한 하도급이 아니다.

미국 현장의 프로젝트 관리 노하우, NRC와의 실무 소통 방식, 복잡한 노동조합 관리, 지역사회 관계 형성 등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암묵적 지식’을 습득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이 모델을 다른 한국 기업들도 적극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3단계 진출 전략: 학습→공급→선도

한국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현실적 로드맵은 3단계로 구성된다.

1단계(단기)는 파트너십을 통한 참여 및 학습이다. 현대건설-Holtec 모델을 확산해 미국 선도기업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기술, 규제, 프로젝트 관리 노하우를 직접 습득한다. KHNP도Orano나 EnergySolutions와 유사한 파트너십을모색하고, 초기에는 미국 에너지부 산하 국립연구소와의 공동연구를 발판으로 활용할 수 있다.

2단계(중기)는 고부가가치 틈새 공급망 진입이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제작 기술을 응용한 특수 방사성 폐기물 운반용기나 원격 해체 장비, KAERI의 ‘암스트롱’ 로봇 기술 상용화 등을 통해 미국 해체 공급망의 핵심 공급자로 자리매김한다. 이는 직접적 수익 창출과 더불어 ‘팀 코리아’의 기술력에 대한 긍정적 평판 구축 효과를 가져온다.

3단계(장기)는 경험 축적 후 시장 선도이다. 고리1호기 해체 성공과 미국 시장 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주계약자로 도약한다. 최종적으로는 KHNP, 현대건설, 두산에너빌리티 등이 참여하는 ‘팀 코리아’ 컨소시엄이 미국 내 노후 원전을 직접 인수해 해체하는 사업까지 고려할 수 있다.

최근 해체가 최종 승인된 고리1호기 프로젝트는 한국이 글로벌 해체 시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 전략 자산이다. 단순한 국내 해체 사업이 아니라, KAERI 개발 기술의 실전 검증, 국내 공급망의 역량 강화,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살아있는 실험실’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SMR 신규건설이 해체 시장 진출의 ‘우회로

’흥미롭게도 최근 KHNP와 두산에너빌리티가 X-energy, Amazon과 체결한 소형모듈원자로(SMR) 신규 건설 협력이 해체 시장 진출을 위한 또 다른 중요한 경로를 제공하고 있다. SMR 신규 공급망에 깊숙이 참여함으로써 미국 원자력 생태계 내에서 신뢰를 구축하고, 미래 SMR 해체 시장에서 ‘설계-건설-운영-해체’를 아우르는 전주기 솔루션 제공자로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북미 원전 해체 서비스 시장은 2023년 23억9000만 달러에서 연평균 4.4% 성장해 2030년 32억3000만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글로벌 시장 전체로는 2023년 68억 달러에서 2032년 105억5000만 달러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성장의 근본 동력은 1970~80년대 건설된 전 세계 원전들의 수명 만료라는 구조적 요인에 기반한다. 원전은 유한한 수명을 가진 자산이므로 해체 시장의 성장은 예측 가능하고 확실하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시장의 수익성은 기술 혁신에 달려 있다. 절단,  폐기물 처리, 부지 조사 등 위험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자율 로봇 시스템 개발이 가속화 되고 있으며, 인공지능을 활용한 프로젝트 관리와 디지털 트윈 기술을 통한 작업 시뮬레이션도 현장에 적용되고 있다.

특히 인건비와 폐기물 처리비라는 두 가지 최대 비용 요소를 직접 절감할 수 있는 로봇 기술과 폐기물 저감 기술에 대한 투자는 미래 경쟁 우위 확보를 위한 필수 전략으로 평가된다.

정책 실패가 만든 ‘ISFSI 족쇄’

미국 해체 시장의 구조적 특징 중 하나는 미국 에너지부(DOE)의 정책 실패로 인한 ‘독립사용후 핵연료저장시설(ISFSI) 문제’다. DOE가 사용후핵연료 영구 처분장 확보에 실패하면서, 모든 해체 부지는 원전 시설이 완전히 철거된 후에도 사용후 핵연료를 현장에 계속 보관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완전한 의미의 부지 해제를 가로막는 영구적 족쇄로 작용하지만, 역설적으로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 및 관리라는 별도의 장기 시장을 창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해체 사업이 이제 단순한 시설 철거를 넘어 수십 년간의 핵연료 관리 사업까지 포괄하게 된 것이다.

과점 구조의 높은 진입장벽

현재 미국 해체 시장은 소수 전문기업의 과점 구조를 띠고 있다. Holtec International은 사용후 핵연료 건식저장 기술을 바탕으로 해체 사업에 수직계열화했고, 프랑스 Orano는 글로벌 해체경험을 미국에 적용하고 있다. EnergySolutions는 자체 보유 폐기물 처분장을 통한 원가 경쟁력이 핵심 무기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한 철거 기술이 아닌, 사용후핵연료 관리, 폐기물 처리, 글로벌 프로젝트 관리 등 해체의 특정 고부가가치 분야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신규 기업이 우수한 해체 계획만으로는 진입이 거의 불가능하며, 수십억 달러 부채를 감당할 재무 건전성과 NRC의 소유권 이전 승인을 받을 규제적 신뢰도를 동시에 갖춰야 한다.

실제 프로젝트 사례들은 해체 비용의 극심한 편차를 보여준다. 메인 양키 원전(PWR, 860MW)은 5억6800만 달러로 8년 만에 해체를 완료해 효율성을 입증했다. 반면 샌 오노프레 원전(PWR, 2기 합계 2586MW)의 예상 해체 비용은 44억 달러에 달한다.

이런 차이는 단순한 용량 문제가 아니라 캘리포니아의 엄격한 환경 규제, 높은 지역 인건비, 복잡한 방사선학적 특성, 폐기물 처리의 물류적 어려움 등 부지별 고유 조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성공적인 해체 기업은 엔지니어링 역량뿐 아니라 미국의 복잡한 주별 규제 및 물류 환경을 헤쳐나갈 전문성을 반드시 갖춰야 함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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