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에너지 안후중 기자] 글로벌 원전 리모델링 시장은 소수의 대형 원전 제조업체(OEM)들이 주도하고 있다. 웨스팅하우스는 전 세계 가압경수로(PWR) 시장의 강자로서 'Ovation'과 'Common Q' 플랫폼 기반의 디지털 I&C 현대화를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프라마톰은 유럽을 기반으로 하여 미국 내 운전허가 갱신 신청의 60%에 참여할 정도로 이 분야의 깊은 전문성을 자랑한다. GE히타치는 비등경수로(BWR) 기술의 선두주자로서 전 세계 BWR 및 PWR 플랜트 대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단순한 부품 공급을 넘어 운전허가 갱신 지원, 엔지니어링 서비스, 장기 유지보수 계약까지 포괄하는 '통합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고객인 전력회사들이 복잡한 수명연장 프로젝트를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전략이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서비스와 디지털 전환

원전 리모델링 산업은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비즈니스 모델이 진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기자재 납품이나 건설 중심의 일회성 사업이었다면, 이제는 운영 데이터 분석, 예측 정비, 사이버보안, 장기 부품 공급 등을 포괄하는 지속적인 서비스 사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기술이다. 원전의 모든 운전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수집되고 클라우드나 데이터센터에서 분석됨에 따라, 서비스 제공업체들은 원격으로도 원전의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최적화 방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지역적 제약을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의 서비스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다.

자금 조달 방식에도 혁신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 원자력은 '녹색' 투자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원자력의 필요성이 인정받으면서 '녹색 채권(Green Bond)'을 통한 자금 조달이 가능해졌다. 캐나다의 브루스 파워와 온타리오 발전이 세계 최초로 원전 설비개선용 녹색 채권을 발행했을 때 예정액의 6배가 넘는 자금이 몰렸고, 2024년에는 미국에서도 첫 원자력 기업 녹색 채권이 성공적으로 발행되었다.

미래 에너지 시스템과의 연계, 유연성과 통합

원전 리모델링은 단순히 기존 설비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을 넘어 미래 에너지 시스템과의 연계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전력망에서는 원전도 기존의 기저부하 운전에서 벗어나 전력 수요와 재생에너지 출력 변동에 맞춰 발전량을 조절하는 '부하추종운전' 능력이 요구된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수명이 다한 대형 원전 부지에 여러 기의 소형모듈원자로(SMR)를 건설하여 '재생(Repowering)'하는 모델도 검토되고 있다. 기존 대형 원전 부지는 이미 전력망, 용수, 보안 등 인프라가 완비되어 있어 SMR 건설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수명연장 사업은 미래 SMR 시대까지 원자력 산업의 기술력과 공급망, 인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사용후핵연료 관리도 중요한 파생 시장을 형성한다. 원전 수명이 40년에서 60년, 80년으로 연장되면 관리해야 할 사용후핵연료의 양도 증가한다. 대다수 국가에서 영구처분장 확보가 지연되는 상황에서, 늘어나는 사용후핵연료를 원전 부지 내에서 안전하게 장기 보관하기 위한 기술과 서비스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도전과제, 인력과 공급망의 취약성 극복

원전 리모델링 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협하는 가장 큰 구조적 위험은 전문 인력과 공급망 문제다. 현재의 원전들을 건설하고 운영했던 숙련된 기술자 세대가 대거 은퇴하면서 전문 인력의 공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대규모 설비개선 프로젝트와 신규 원전 건설이 동시에 추진될 경우, 자격을 갖춘 엔지니어, 용접사, 기술자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할 수 있다.

공급망 역시 취약하다. 지난 수십 년간 신규 원전 건설이 정체되면서 원자력 등급의 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공급업체의 수가 크게 감소했다. 이로 인해 특정 부품의 공급망이 소수 업체에 독점되거나 단절될 위험이 커졌다.

또한 디지털화는 새로운 위험인 사이버 공격의 위협을 야기한다. 원전의 디지털 I&C 시스템이 외부의 악의적인 공격에 노출될 경우 발전소의 안전과 보안에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현대화는 반드시 강력한 사이버보안 대책과 병행되어야 한다.

사회적 수용성, 투명성과 신뢰 구축의 중요성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회적 수용성이다. 월성 1호기 수명연장 과정은 안전성 논란, 정보 비공개, 절차적 정당성 문제 등으로 인해 극심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다. 이는 결국 장기간의 법적 소송으로 이어졌으며, 투명한 정보 공개와 실질적인 주민 참여 보장이 없이는 아무리 기술적으로 완벽한 프로젝트라도 사회적 비용을 유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구 밀집 지역에 위치한 고리 원전 등의 계속운전 추진 과정에서도 주민들의 안전에 대한 우려와 불신은 여전히 높다. 따라서 안전성 평가 결과와 방사선환경영향평가 등 핵심 정보의 투명한 공개, 심의 과정에 지역 주민과 시민사회의 실질적 참여 보장, 그리고 합리적인 지역사회 혜택 제공을 통한 사회적 합의 형성이 필수적이다.

규제 효율화와 생태계 강화해야

원전 리모델링 산업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책적 뒷받침이 중요하다. 우선 규제 절차의 합리화가 시급하다. 고리 2호기 사태가 보여주듯 경직되고 예측 불가능한 규제는 국가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심사 기간 단축, 절차 효율화, 그리고 사업자가 예측 가능한 일정에 따라 투자를 계획할 수 있는 규제 프레임워크 개선이 필요하다.

미국의 사례를 참고하여 계속운전 허가 단위를 현재 10년에서 20년으로 연장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이는 장기적 투자 안정성을 제공하고 사업자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산업 생태계 측면에서는 체계적인 인력 양성 프로그램 구축, 중소 부품업체를 위한 기술개발 지원, 첨단 제조 기술 도입 인센티브 제공 등을 통해 공급망을 강화해야 한다. 원자력 산업의 인력과 공급망은 한번 무너지면 복구에 오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드는 국가 전략 자산이기 때문이다.

산업계 전략, 디지털 혁신과 글로벌 진출

산업계 역시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우선 디지털 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디지털 I&C, AI 기반 예측진단, 디지털 트윈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경쟁력이다. 이러한 기술에 대한 선제적 투자를 통해 국내 원전의 운영 효율성과 안전성을 극대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차별화된 기술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비즈니스 모델도 전환이 필요하다. 단순한 기자재 납품이나 건설 중심에서 벗어나 운영 데이터 분석, 예측 정비, 사이버보안, 장기 부품 공급 등을 포괄하는 '통합 LTO 솔루션'을 제공하는 서비스 기업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동시에 고객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길이다. 특히 루마니아 체르나보다 사업의 성공 모델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국내 노후 원전의 계속운전 프로젝트를 단순한 내수 사업으로 보지 말고, 새로운 기술과 공법을 시험하고 실적을 쌓는 '글로벌 시장 진출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해야 한다. 세계적 경쟁력을 입증한 중수로 설비개선 분야에서 추가적인 해외 사업 수주를 목표로 전략적 영업 활동을 펼쳐야 한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 미래를 향한 여정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연장과 현대화는 단순히 낡은 시설을 개보수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는 기후 위기와 에너지 안보라는 21세기 최대 도전에 대응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해법이다. 동시에 4차 산업혁명 기술과 전통 산업이 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혁신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건설과 운영 역량을 바탕으로 이 새로운 시장에서 선도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루마니아 체르나보다 프로젝트의 성공은 그 가능성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회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다. 규제의 합리화와 예측 가능성 제고, 사회적 신뢰 구축과 수용성 확보, 전문 인력과 공급망 강화, 그리고 지속적인 기술 혁신 등 다차원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정부, 산업계, 학계, 시민사회가 함께 협력해야 달성할 수 있는 종합적 과제다.

원전 리모델링 산업의 성공적 육성은 한국이 미래 에너지 시스템의 핵심 기술을 선도하고, 글로벌 에너지 전환을 주도하는 국가로 도약하는 발판이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하나의 산업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에너지 미래를 향한 대한민국의 여정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이 원전 리모델링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을지는 지금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실행에 달려 있다. 기회의 창이 활짝 열린 지금, 과감하고 지혜로운 결단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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