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에너지 안후중 기자] 전 세계 에너지 시스템이 중앙집중형 모델의 한계에 직면하며 분산에너지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필연성을 기술적, 경제적, 환경적 측면에서 심층 분석하고, 독일, 캘리포니아, 호주 등 글로벌 선도국의 사례를 통해 성공 전략과 과제를 살펴본다. 이를 바탕으로, 2024년 6월 시행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을 중심으로 한국의 현주소와 미래 과제를 진단하고, 가상발전소(VPP), 에너지저장장치(ESS), V2G(Vehicle-to-Grid) 등 핵심 기술의 역할과 우리가 나아가야 할 전략적 방향을 제시한다.
중앙집중형 시스템은 막대한 송배전 손실과 인프라 투자 비용, 사회적 수용성 저하 등 구조적 비효율성에 봉착했다. 이에 대한 대안인 분산에너지는 단순히 신재생에너지를 보급하는 차원을 넘어, 에너지 시스템의 효율성, 회복탄력성, 경제성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새로운 생태계를 의미한다. 글로벌 선도국들은 이미 단순 보급을 넘어 분산자원을 효과적으로 통합하고 제어하는 ‘2단계’ 전략으로 진입했으며, 이는 시장 제도 개편과 기술 혁신을 통해 분산자원의 ‘유연성’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한국의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은 지역별 전기요금제, 특화지역, 설치 의무화 등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하며 패러다임 전환의 법적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법의 성공은 향후 시행령과 시장 제도의 구체적인 설계에 달려있다. 한국은 ICT, 배터리, 자동차 등 세계적 수준의 산업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어, 이를 분산에너지 생태계와 융합한다면 현재의 추격자 위치에서 벗어나 글로벌 리더로 도약할 잠재력이 충분하다.
새로운 에너지 패러다임, 중앙집중형 모델의 해체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 경제 성장의 동력이었던 중앙집중형 에너지 시스템은 이제 그 구조적한계에 도달했다. 대규모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장거리 송전망을 통해 일방적으로 공급하는 20세기 모델은 기술적 비효율, 경제적 부담, 사회적 갈등이라는 복합적인 문제에 직면하며 지속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전통적인 전력망은 대규모, 원격 발전소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수요지까지 전력을 수송하는 과정에서 본질적인 비효율과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유발한다.
첫째, 송배전(T&D) 과정에서의 물리적 전력 손실은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의 경우, 2019년 기준 송배전 손실률은 3.54%로, 이는 약 19,000 GWh의 전력이 최종 소비자에게 도달하기 전에 공중으로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 손실량은 1 GW급 원자력 발전소 2기 이상이 1년 내내 생산하는 전력량과 맞먹는 규모이며,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연평균 1조 6,755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매년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둘째, 중앙집중형 모델은 지속적이고 자본 집약적인 송배전망 인프라 투자를 요구한다. 한국의 송변전 설비 투자 및 유지보수 비용은 2011년 2조 6,220억 원에서 2020년 3조 3,774억 원으로 10년 새 30% 가까이 증가했다. 더욱이, 산업 구조 변화와 수요 중심지의 이동으로 인해 기존의 대규모 송전망 자산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거나 불필요해지는 ‘좌초자산’ 위험이 커지고 있다.
셋째, 전통적 그리드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기저부하 발전에 최적화되어 있어,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VRE)의 대규모 통합에 기술적 한계를 드러낸다. 일조량이나 풍량에 따라 출력이 급변하는 태양광, 풍력 발전 비중이 높아질수록 전력망의 주파수와 전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는 전력망 안정을 위해 재생에너지 출력을 강제로 차단하는 ‘출력제어’를 증가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며, 귀중한 청정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든다.
환경적 압박과 사회적 계약, 대규모 발전의 한계
중앙집중형 모델은 경제적 비효율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와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그 존립 기반인 ‘사회적 운영 면허’를 빠르게 상실하고 있다. 대규모 발전소와 이를 연결하는 장거리 송전선로 건설은 필연적으로 극심한 지역 주민의 반대와 환경 갈등을 유발한다. 발전소 부지 선정부터송전탑 건설에 이르기까지, 소위 ‘님비(NIMBY)’ 현상은 프로젝트 지연과 비용 상승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동시에, 파리 협정과 각국의 탄소중립 선언 등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적 합의는 화석연료 기반의 중앙집중형 발전 모델을 환경적으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에너지 시스템의 탈탄소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 과제가 되었으며, 이는 대규모 재생에너지 단지와 함께 수요지 중심의 분산에너지 보급 확대를 통해서만 달성 가능하다.
미래의 정의, 분산에너지자원(DER)의 핵심 개념과 편익
분산에너지는 전력 시스템을 일방향의 수직적 구조에서 양방향의 네트워크 생태계로 근본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분산에너지(Distributed Energy Resources, DERs)는 에너지가 사용되는 공간이나 인근 지역에서 생산 및 소비되는 모든 에너지 자원을 포괄한다. 한국의법률에서는 40 MW 이하의 발전설비나 500 MW 이하의 집단에너지 설비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분산에너지가 제공하는 핵심적인 편익은 먼저 경제적 편익을 들 수 있다. 송배전 손실을 최소화하고 값비싼 대규모 송전망 인프라 투자를 회피하거나 지연시킴으로써 국가 전체의 에너지 비용을 절감한다. 다음으로는 회복탄력성(Resilience) 증진이다. 전력망이 소수의 대규모 발전소에 의존하는 중앙집중형 시스템은 단일 장애점(Single Point of Failure)에 매우 취약하다. 반면, 다수의 소규모 전원이 네트워크 형태로 연결된 분산형 시스템은 일부 전원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다른 전원을 통해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어 전체 시스템의 안정성과 재난 대응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다.
또한 환경적 편익을 제공한다.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원의 수용성을 높여 에너지 시스템의 탈탄소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그 밖에 소비자 주권도 강화할 수 있다. 기존의 수동적인 에너지 소비자(Consumer)를 능동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저장하며, 판매까지 하는 ‘프로슈머(Prosumer)’로 변화시킨다. 이는 개인과 지역사회에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고 에너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기반이 된다.
글로벌 선구자들, 분산에너지 전환 사례
분산에너지로의 전환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진행되고 있다. 각국의 고유한 정책 환경, 시장 구조, 사회적 여건에 따라 각기 다른 모델이 발전하고 있으나, 성공적인 사례들은 공통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독일의 에너지 전환, 즉 ‘에너지벤데’는 정부의 정책과 시민 사회의 자발적 참여가 결합된 상향식 혁명의 대표적 사례이다. 독일은 2050년까지 전력의 8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한다는 야심 찬 목표 아래, 강력한 발전차액지원제도(FiT)와 탈원전 정책을 기반으로 에너지 전환을 추진해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에너지 민주주의’의 실현이다. 독일 재생에너지 설비의 약 40%가 일반 시민이나 지역 협동조합에 의해 소유되고 있으며, 이는 정책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하고 보급 속도를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기술적으로 독일은 VRE의 간헐성을 관리하는데 있어 세계적인 리더로 부상했다. 2024년 기준, 독일은 전체 발전량의 55% 이상을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면서도 안정적인 계통 운영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재생에너지를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아닌, 예측과 제어가 가능한 시장 참여자로 편입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독일의 가장 큰 과제는 이제 전력망 병목 현상이다. 풍력 자원이 풍부한 북부에서 생산된 막대한 양의 전력을 주요 산업단지가 밀집한 남부로 수송해야 하지만, 기존 송전망의 용량은 한계에 도달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강력한 주 정부의 정책과 규제를 통해 기술 및 시장 혁신을 이끌어내는 하향식 모델의 전형을 보여준다. 캘리포니아 에너지 정책의 핵심은 ‘SB-100’ 법안으로, 2045년까지 100% 무탄소 전력 공급을 법적으로 의무화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분산에너지 보상 체계의 진화이다. 캘리포니아는 과거 잉여 전력을 생산한 만큼 전기요금을 상계해주던 관대한 순계량요금제(NEM 1.0/2.0)에서, 2023년 4월부터 NEM 3.0 체제로 전환했다. NEM 3.0은 태양광 발전으로 생산된 잉여 전력의 판매 단가를 기존 대비 약 75% 대폭 삭감했다. 이는 단순히 태양광 보급 속도를 조절하려는 목적을 넘어, 태양광과 배터리 저장장치(ESS)의 결합을 경제적으로 강제하기 위한 정교한 정책 설계이다.
이와 함께 캘리포니아는 전력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73억 달러 규모의 대대적인 전력망 현대화 계획에 착수했으며, 재난 시에도 전력 공급이 가능한 마이크로그리드와 ESS 기술 개발을 적극 지원하며 분산자원 통합을 위한 물리적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호주의 태양광 지배력: 프로슈머 시장에서 첨단시장 설계까지
호주는 시장의 힘과 정부의 초기 지원이 결합하여 세계 최고의 옥상 태양광 보급률을 달성한 후, 이제는 DER로 포화된 전력망을 관리하기 위한 혁신적인 시장 제도를 선도하고 있다.
호주는 전 세계에서 1인당 옥상 태양광 보급률이 가장 높은 국가로, 전체 가구의 25% 이상이 자체 태양광 설비를 보유하고 있다. 이제 호주의 정책적 관심은 보급 확대를 넘어 ‘효율적 통합’으로 이동하고 있다. 서호주가 도입한 ‘분산에너지 환매제도(DEBS)’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DEBS는 단순한 발전차액지원제도와 달리, 전력망에 전기를 역송전하는 시간에 따라 보상 단가를 차등 적용한다. 전력 수요가 적고 태양광 발전량이 많은 낮 시간대에는 kWh당 3센트의 낮은 가격을,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저녁 피크 시간대에는 kWh당 10센트의 높은 가격을 지급한다. 이는 소비자들이 낮에 생산된 잉여 전력을 ESS에 저장했다가 저녁에 판매하도록 강력하게 유도하며, 태양광 프로슈머들이 자발적으로 계통 안정화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시장 기반의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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