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에너지 안후중 기자] 전 세계가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전환점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원자력 산업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다. 신규 원전 건설의 시대를 지나 기존 원전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수명연장’과 ‘현대화’가 핵심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원전 리모델링’ 산업이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가동중인 원전의 평균 연령은 이미 31년을 넘어섰다. 대부분 국가에서 원전의 설계수명을 30-40년으로 설정했던 점을 고려하면, 현재 운영 중인 상당수 원전이 수명 연장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기후변화 대응 압박과 에너지 안보 강화 요구가 맞물리면서, 원전 수명연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막대한 초기 투자비용과 10년 이상의 긴 건설기간이 필요한 신규 원전과 달리, 기존 원전의 수명을 20~30년 더 연장하는 것은 가장 경제적이고 신속하게 저탄소 기저전력을 확보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 규모와 성장 전망원전 수명연장 시장의 성장 속도는 놀랍다. 시장조사 전문기관들에 따르면, 2023년 약 152억 달러(약 20조원) 규모였던 글로벌 원전 수명연장 시장은 연평균 9.3%의 견고한 성장률을 보이며 2033년에는 365억 달러(약 48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폭발적 성장의 배경에는 세 가지 핵심동인이 있다. 첫째는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저탄소 전력원의 필요성이다. 원자력은 수력과 더불어 가장 큰 규모의 무탄소 기저전력을 공급하며, 간헐성을 가진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하는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둘째는 지정학적 불안정성으로 인한 에너지 안보 강화 요구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화석연료 의존도의 위험성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수단으로서 원자력의 중요성이 재조명되고 있다.
셋째는 압도적인 경제성이다. IEA 분석에 따르면, 원전 장기 운영의 균등화발전원가(LCOE)는 메가와트시(MWh)당 30~40달러 수준으로, 가장 경제적인 저탄소 발전 옵션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는 신규 원전(60~150달러)은 물론 상당수 재생에너지 발전원과 비교해도 경쟁력이 있는 수준이다.
미국이 이끄는 제도 혁신
세계 각국은 고유한 에너지 정책과 규제 철학에 따라 다양한 원전 수명연장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미국의 제도가 가장 체계적이
고 선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는 원전의 최초 40년 운영허가 이후 20년씩 두 차례까지 연장을 허용해 최대 80년간 운전할 수 있도록 하는 ‘후속 운전허가 갱신(SLR)’ 제도를 확립했다. 이 제도의 핵심은 상세한 기술 지침과 표준화된 심사 절차를 통해 규제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또한 에너지부(DOE)는 ‘민간 원자력 크레딧’ 프로그램을 통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원전이 조기 폐쇄되지 않도록 재정 지원을 제공하며 정책 의지를 뒷받침하고 있다.
프랑스는 다른 접근방식을 택했다. 법적으로 고정된 운영허가 기간을 설정하지 않는 대신, 원자력안전규제기관(ASN)이 주관하는 10년 주기의 ‘주
기적안전성평가(PSR)’ 결과에 따라 계속운전 여부를 결정한다. 최근 ASN은 프랑스 전역의 900MW급과 1300MW급 원전들의 40년 초과 운전을 승인했는데, 이는 최신 EPR 노형의 안전 기준에 근접하는 대대적인 설비 개선을 전제로 한다.
일본은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 운전을 원칙적으로 40년, 예외적으로 60년으로 제한했으나, 최근 에너지 안보와 탈탄소 목표를 위해 정책을 극적으로 전환했다. 개정된 법률은 안전 심사 등으로 가동이 정지된 기간을 운전 기간 산정에서 제외함으로써 사실상 60년을 초과하는 운전을 허용하고 있다.
한국의 원전, 정책 전환기의 성장통
대한민국은 총 25기의 상업용 원전을 운영하며 국가 전체 전력생산의 약 30%를 담당하고 있다. 현재 한국 원전 포트폴리오는 본격적인 ‘세대교체기’에 진입했다. 2030년까지 고리 2, 3, 4호기, 한빛 1, 2호기, 한울 1, 2호기, 월성 2, 3, 4호기 등 총 10기의 원전이 설계수명 만료 시점에 도달한다. 이는 향후 10년간 국내 원전 리모델링 시장이 지속적이고 대규모로 형성될 것임을 예고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이전 정부의 탈원전 정책과 현 정부의 원전 활용 정책 사이의 급격한 전환으로 인해 심각한 성장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고리 2호기 사례가 대표적이다.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계속운전 신청이 늦어진 이 원전은 현 정부 출범 후 뒤늦게 신청을 했지만, 복잡한 규제 절차를 제때 완료하지 못해 2023년 4월 설계수명 만료와 함께 가동을 멈춰야 했다. 이로 인한 전력 판매 손실과 값비싼 LNG 발전을 통한 대체 비용을 합산하면 2년간 약 1조 5천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
월성 1호기의 조기 폐쇄 역시 논란이 됐다. 한수원의 경제성 평가가 실제 시장 가격인 전력 도매가가 아닌 임의로 정해지는 낮은 정산단가를 기준으로 하여 수익성을 의도적으로 낮게 평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계속운전의 경제적 가치를 평가하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기준이 부재함을 보여준다.
핵심 기술 혁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원전 리모델링의 핵심은 기술 현대화에 있다.
특히 계측제어시스템(I&C)의 디지털화는 필수적이다. 수십 년 전에 건설된 많은 원전들은 현재 단종되어 유지보수가 어려운 아날로그 방식의 I&C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 이를 최신 디지털 기술 기반의 통합 시스템인 ‘인간-기계 연계시스템(MMIS)’으로 교체하는 것은 안전성, 신뢰성, 운전 편의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다.
대한민국은 이 분야에서 완전한 기술 자립을 달성했다. 2001년부터 시작된 ‘원전계측제어시스템 개발사업단(KNICS)’ 프로젝트를 통해 2010년 마침내 원전의 안전 및 비안전 계통을 모두 제어하는 완전한 국산 MMIS 개발에 성공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상용화한 이 시스템은 신한울 1, 2호기에 최초로 적용되어 성공적으로 운영 중이다.
더 나아가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도입이 원전 운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인공지능(AI) 기반 예측진단 기술을 통해 과거의 시간 기반 예방정비에서 설비의 실제 상태를 기반으로 고장을 사전에 예측하는 예측 정비로 전환하고 있다.
한수원은 이미 전국 모든 원전의 핵심 설비로부터 실시간 데이터를 수집해 AI로 분석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14건 이상의 불시정지를 예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디지털 트윈 기술도 주목할 만하다. 현실의 원자력발전소를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 동일하게 복제하여 실제 플랜트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다
양한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한수원은 2025년까지 새울 1, 2호기에 디지털 트윈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기술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첨단 제조 기술인 3D 프린팅도 원전 산업에 혁신을 가져오고 있다. 수십 년간 운영된 노후 원전은 부품 단종으로 인한 예비품 확보 어려움에 직면하는데,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하면 복잡한 형상의 부품도 신속하게 제작할 수 있어 공급망의 취약점을 해결할 수 있다.
루마니아 체르나보다 프로젝트의 의미
한국의 원전 리모델링 역량은 이미 국제무대에서 검증받았다. 한국수력원자력(KHNP), 두산에너빌리티, 한전기술, 한전KPS로 구성된 ‘팀 코리아’는 루마니아 체르나보다 원전 설비개선 사업 수주에 성공했다. 총 사업비 약 2조 8천억원 규모의 이 프로젝트에서 한국 컨소시엄은 약 1조 2천억원 규모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
이 성공의 비결은 각 기업의 전문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데 있다. 한수원이 사업 전체를 총괄하고, 두산에너빌리티가 세계적 수준의 디지털 MMIS 기술을 제공하며, 한전기술이 종합설계를 담당하고, 한전KPS가 월성 1호기 설비개선에서 세계 최단기간 공사 기록을 세운 중수로(CANDU) 특화 기술을 투입하는 완벽한 협력 모델이 구현되었다.
특히 한국이 강점을 보이는 중수로 설비개선 분야는 매우 특화된 시장이다. 일반적인 경수로의 수명연장과 달리, 중수로는 원자로 심장부의 압력관, 칼란드리아관 등 수백 개의 핵심 부품을 완전히 교체하는 대수술에 가깝다. 이 공정은 고방사선 환경에서 원격으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특수 로봇과 정밀 공구가 필수적이며, 세계적으로 소수 기업만이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계속운전 현황, 기회와 위기 공존
국내에서는 현재 고리 2호기가 계속운전 심사를 진행 중이며, 고리 3, 4호기와 한빛 1, 2호기, 한울 1, 2호기가 계속운전 신청을 완료한 상태다. 또한 월성 2, 3, 4호기의 계속운전도 예정되어 있다.
한국의 계속운전 제도는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주기적안전성평가(PSR)’를 핵심으로 한다. 특히 설계수명 만료 후 계속운전을 위해서는 일반 PSR보다 훨씬 강화된 ‘계속운전 PSR’을 통과해야 한다. 이 평가는 총 16개 항목을 포함하며, 주요기기 수명평가, 최신 기술기준을 활용한 안전성 평가, 방사선환경영향평가 등이 핵심이다.
중요한 점은 ‘최신 기술기준’의 적용이다. 이는 단순히 원전이 최초 건설 당시의 허가 기준을 만족하는지를 넘어, 현재 시점의 가장 엄격한 안전 기준과 비교하여 차이를 분석하고 안전성 증진을 위한 보완 조치를 도출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계속운전 심사가 사실상 원전을 현재 기준에 맞춰 ‘재허가’하는 것에 준하는 높은
수준의 규제 강도를 가짐을 의미한다.
최근 정부는 계속운전 심사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신청 기한을 기존 ‘설계수명 만료 2~5년 전’에서 ‘5~10년 전’으로 확대하는 제도 개선을 단행했다. 또한 계속운전의 법적 근거를 기존 시행령에서 원자력안전법 본법으로 상향 조정해 제도의 안정성과 명확성을 강화하는 입법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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