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에너지 박명종 기자]
산업용 전기요금 급등이 촉발한 대기업들의 새로운 선택
LG화학과 SK어드밴스드가 한국전력을 거치지 않고 전력거래소에서 직접 전력을 구매하는 '전력 직접구매제도'를 본격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22년 만에 처음 실현되는 제도 활용 사례로, 한국 전력산업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에는 가파른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이 있다. 2022년 1분기 킬로와트시(kWh)당 105.5원이었던 산업용 전기요금은 2024년 말 185.5원까지 올라 75.8% 급등했다. 같은 기간 가정용 전기요금 상승률(37%)의 두 배 수준이다. 정부가 사회적 갈등을 우려해 가정용 전기요금 인상은 최소화하고, 상대적으로 조정이 쉬운 산업용 전기요금을 연이어 올린 결과다.
현재 한전의 산업용 전기 판매가는 kWh당 약 182원으로, 전력거래소 도매가격(SMP) 평균 124.7원을 크게 웃돈다. 전력거래소에서 도매시장 가격에 망 이용료 등을 더해도 직접구매 가격이 한전의 산업용 전기요금보다 kWh당 30원 정도 저렴한 상황이다.
석유화학업계의 경우 전기료가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년 전 1%에서 현재 거의 3%까지 치솟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 따르면, 전기요금 민감 업종 112개사의 지난해 평균 전기요금 납부액은 2022년보다 36.4% 늘었고, 매출액 대비 전기요금 비중도 7.5%에서 10.7%로 상승했다.
현재 3만kVA 이상 전기를 사용하는 산업체는 약 500여 곳으로 전체 소비자의 0.002%에 불과하지만, 전체 전기사용량의 29% 이상을 점유하는 한전의 '큰손'들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서는 제조기업 10곳 중 4곳이 자가발전이나 전력 직접구매 등 새로운 전력조달방식을 시도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전력시장 구조 개편의 신호탄: 독점에서 경쟁으로의 전환
전력 직접구매제도의 본격 활용은 단순한 비용 절감 차원을 넘어 한국 전력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예고한다. 수십 년간 이어진 한전의 독점 판매 구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기업들의 '체리피킹' 행위를 막기 위해 제도를 보완했다. 최소 계약 기간을 기존 1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계약을 중도 해지할 경우 최대 9년간 직접구매 재진입을 제한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직접구매자에게도 형평성 차원에서 각종 부과정산금과 복지특례할인비 등을 부과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기업들이 직접구매제도를 검토하고 있다. 한화솔루션, 코레일 등이 제도 활용을 고민하고 있으며, 화학산업협회 관계자는 "석화 기업 중에서 전력 직구에 관심이 없는 곳은 없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가 전력시장의 근본적 개편을 요구한다고 분석한다. 서울과기대 유승훈 교수는 "지금 같은 추세라면 한전의 고객사가 최대 4분의 1 정도 빠져나갈 수 있고, 이 경우 한전의 매출은 최대 16조원까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며 "산업용 전기료에 대해서만 연료비 연동제를 실제 작동시키거나 산업용 전력에 한해 민간에 판매시장을 개방하는 등 제도를 통해 산업용 전기료를 낮춰야 한다"고 제안했다.
건국대 박종배 교수는 "소매 부문의 경쟁을 촉진하는 첫 단계로 볼 수 있다"며 "원가가 투명하게 결정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원가주의와 시장주의, 독립주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전기요금 결정 거버넌스의 독립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과기대 정연제 교수는 "판매 경쟁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며 "한전이 그동안 제공해 왔던 발전-송·배전-판매의 분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망 요금 체계가 합리적으로 갖춰져야 하며, 망요금 산정 과정에서 투명성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전의 우려도 현실적이다. 부채 203조원, 누적 적자 43조원에 달하는 한전의 재무 상황에서 우량 고객들의 이탈은 재정 악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선택권이 없는 중소기업과 일반 소비자의 전기료 부담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전력시장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고 조언한다. 한 전력시장 전문가는 "직접구매 고객이 피크부하시간에 사용량을 줄이면 부하평탄화로 SMP도 떨어져 한전도 그 혜택을 보게 된다"며 "영역을 뺏긴다고 편협하게만 볼 사안이 아니라 소매요금 자유화 등 후속논의로 발전시켜 나갈 사안"이라고 말했다.
전력 직접구매제도의 본격 시행은 한국 전력시장이 독점에서 경쟁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다. 이제 정부와 전력 당국은 요금 체계의 합리화, 독립 규제기관 설립, 시장 개방 확대 등 종합적인 전력시장 개편에 나서야 할 시점에 직면했다. 탄소중립, 산업 경쟁력 유지, 에너지 안보라는 다중 과제를 균형 있게 해결하는 새로운 전력시장 거버넌스 구축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 용어 설명
ㆍ체리피킹(cherry picking) = 어떤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 가운데 비용 대비 효율이 뛰어나거나 인기가 있는 특정 요소만을 케이크 위 체리 뽑듯이 골라 자신에게 유리하게 소비하려는 현상을 가리키는 경제 용어.
ㆍSMP = 전력 도매가격(계통한계가격)

